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영진위 지원사업에 한숨만 가득
[성하훈 기자]
▲ 지난 23일 열린 2024 영화진흥위원회 사업설명회 |
ⓒ 성하훈 |
"이게 지원을 하겠다는 건지 혼란스럽게 만들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필요한 사업은 없어지거나 예산이 삭감됐고, 급하지 않은 사업에 예산이 편성됐다."
"지원 수준이 2000년 이전으로 20년 이상 후퇴한 것 같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상암동 메가박스 월드컵경기장점에서 열린 2024년 영화진흥위원회 사업설명회에 참석한 영화인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이후 5년 만에 개최된 대면 행사다 보니 온라인으로 생중계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좌석이 채워졌을 만큼 영화인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러나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지원사업 개요를 듣던 참석자들은 관심 있는 사업에 대한 예산과 특징 등을 확인하고는 실망감이 역력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사라진 지원에 영화제 위기
특히 국내영화제들의 표정은 더 어두웠다. 올해 국내외 영화제들을 합쳐 10개 안팎의 영화제만 지원받을 수 있는 데다 예산은 17억으로 책정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원을 받는 게 바늘구멍이 됐다. 마켓이나 기획개발 프로그램 등에 7억 예산이 별도로 배정됐으나 혜택을 볼 수 있는 영화제가 예년 40개 정도에서 10개 안팎으로 75% 가까이 대폭 줄어들게 되면서 근심이 커지는 것이다.
영진위 측은 개최 지원이 아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올해 사업의 방향이라고 밝혔으나, 한국영화 상영 편수로 정해진 기준에 영화제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올해 지원기준은 한국영화 장편 50편 이상 상영하면 1억~5억을 신청할 수 있고, 50편 미만~30편 이상은 5000만 원~1억, 30편 미만~10편 이상은 5000만 원 이하로 정해졌다. 단편 3편은 장편 1편으로 인정된다.
지난해 기준 한국영화 50편 이상 상영 영화제는 전주, 부천, 부산 정도다. 부산영화제도 해운대에서 상영된 기본 프로그램만 따지면 50편에 미달하고. 커뮤니티비프 상영작을 합쳐야 이 기준을 넘어선다.
▲ 2024 영진위 국내 및 국제영화제 지원사업 방향 |
ⓒ 성하훈 |
무엇보다 국제영화제는 다양한 나라의 작품을 소개하는 게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런데도 한국영화 편수가 기준이 되면서 해외영화보다는 한국영화 상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국제영화제의 특성을 무시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진위 측은 "사업 설계에 다소 오류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부천영화제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해외영화보다는 한국영화 편수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영진위가 한국 독립영화 기획개발과 제작지원 등을 다 줄이면서 독립영화 제작 환경이 열악해졌다"며 "이런 환경에서 한국영화를 기준으로 한 것은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부산영화제의 한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의 질적 하락이 우려되는데, 정작 영진위 직원은 그 이유를 되묻더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영화제 위상에 맞는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서는 완성도 등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영화 상영작을 늘리는 것에만 집중할 경우 독립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드는 상태에서 이전에는 선정이 쉽지 않았던 작품들이 선정될 수밖에 없다. 이는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이 떨어질 수 있는 환경으로 귀결되는데, 영진위 실무자들은 이런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지역에서 개최되는 독립영화제들은 한국영화 10편 기준은 넘어서고 있으나 지원 대상이 10개 내외로 좁혀지면서 사실상 대부분이 배제될 상황이라는 것도 큰 문제다. 최근 수년간 가장 성과가 좋았던 지역 영화예산 전액 삭감에 이어 지역독립영화제를 말살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진위 관계자들에 따르면 10개 내외 지원은 문체부의 지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전체 영화제 지원예산은 25억 1900만 원으로 편성됐으나 실질적인 지원액은 24억 정도로 1억 넘게 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영진위 측은 "나머지 비용은 영화제 사후 평가 작업에 사용된다"며 "평가용역에 1억 1000만 원, 심사경비에 900만 원이 편성됐다"라고 밝혔다.
<서울의 봄> 흥행에 영발기금 고갈 면해
다른 지원사업들도 마찬가지다. 독립영화 제작지원은 자기부담금 10%가 신설됐다. 50%를 신인으로 한정했고, 신청자격도 개인은 불가능하고 사업자만 가능하도록 했다. 지난해 촬영이 시작됐거나 30% 이상 촬영이 진행된 작품은 신정이 불가능해 사실상 사전제작 지원 기능이 사라진 셈이다. 개봉지원도 상하반기 2회 공모에서 상반기 1회 공모로 줄어들며 더욱 좁은 문이 됐다.
▲ 지난 23일 열린 2024 영진위 사업설명회에서 인사믈을 통해 예산과 관련해 영화인들에게 사과하고 있는 박기용 영진위원장 |
ⓒ 성하훈 |
이날 설명회에서 인사말을 한 박기용 영진위원장은 먼저 "사업 예산과 관련해 많은 비판을 들었다"며 영화인들에게 사과하고, "정부 긴축재정 기조와 사업구조 재조정에 따른 것으로 지원사업의 재원인 영화발전기금의 고갈에 따른 원인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기용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영화발전기금 잔액을 공개했는데, "현재 40억 원이 남아 있고 <서울의 봄> 흥행 덕분에 간신히 고갈을 면한 상태로, 재원 다각화가 절실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일부 독립영화 관계자들은 지난해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영상 콘텐츠 산업의 규모를 40조 원 수준으로 키우는 장기적 지원에 나서고, 에미상과 아카데미상 등 주요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이른바 킬러 콘텐츠를 5년 동안 다섯 편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밝힌 것을 겨냥해 "현실도 모르는 장관이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다. 처참할 정도로 영화예산 다 깎아 놓고 영화가 진흥되길 바랄 순 없는 일 아니냐"며 싸늘한 반응을 나타냈다. (관련 기사 : 블랙리스트 수준으로 되돌아간 영진위 새해 예산 https://omn.kr/26wi5)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석열-한동훈의 충돌, 이 자료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 중동 전쟁 확대될까? 반군들이 무력 시위에 나선 진짜 이유
- 김건희에 몸 낮춘 김경율 "도이치 주가조작, 더 밝혀질 것 없어"
- "이복실, 이자순, 최희순..." 강제동원 할머니가 울먹이며 부른 이름
- 일본 극우와 보조 맞춘 류석춘 발언, 학문적 목적?
- 세계가 외면한 윤 대통령의 꼼수, 외신의 족집게 비판
- 이 칼럼니스트가 논쟁적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
- 용혜인 "민주당에 유감... 윤석열 사당 심판할 유일한 길 가자"
- '빚내서 집사라?' 정부, 보금자리론 또 10조원 내외로 공급
-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지고 국민의힘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