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지은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허준

김삼웅 2024. 1. 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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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67] 허준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인간의 유형을 크게 나누면 이타적 유형과 이기적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생명체들의 거대한 생존투쟁의 장이다. 인간 역시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존재로서 공동체적 사회 안에서 상호경쟁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한없이 이기적인 인간 중에는 이타성의 상호부조, 품앗이, 협동과 같은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허준(許浚, 1539~1615)은 무과 출신으로 지방관을 두루 거친 아버지 허론과 소실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서자로 출생한 까닭에 중인인 역관과 의원밖에 진출할 기회가 없었던 신분이었다.

어려서부터 역사와 경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중인 출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 의원이 되는 길을 걸었다. "청년 시절 허준은 주로 호남 및 기호 지역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조대 정승을 지낸 미암 유희춘의 일기 <미암일기>에는 젊은 시절 광주와 담양 그리고 해남 등지에서 향의로 활동하던 허준의 일상이 묘사되어 있다."(김호, <허준>)
▲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영정 허준은 우리나라 한의학서 중에 가장 신뢰받는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편찬한 이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저되었다.
ⓒ 정윤섭
 

허준은 '잡과'라 불리는 의관시험에 합격하고 전라도 지역에서 성실하게 의원활동을 하였다. 20대 후반~30대 초반에 그의 명성은 호남을 넘어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여기에는 해남 출신 유희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는 허준을 지켜보면서 인품과 의술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1569년에는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 의원으로 천거하였다. 즉 임금과 그 가족의 의료진이다. 그는 30살에 내의원으로 출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어의가 된 것이다.

궁벽한 시골의 서자 출신이 젊은 나이에 내의원 의원으로 출사한 것은 행운이었다. 행운은 이어졌다. "허준은 본격적으로 당대 최고의 어의 양예수로부터 의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양예수의 기술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가 남긴 <의림촬요>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앞의 책)

조정에서 허준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가고 의술이 이를 뒷받쳐주었다. 1591년(선조 24) 왕자의 질병을 잘 치료한 공로로 선조는 당상관의 품계를 내렸다. 3품에 해당하는 당상관은 고관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위치였다. 이를 두고 사헌부에서 반대의견을 냈다.

왕자의 질병은 극렬 돌보아 끝내 낫게 되었으니 그 공로로 보상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품계로 시약청의 가장 우대하는 은전과 같이 내려주시니, 등급이 지극히 엄하고 명기(名器)가 가석한테 어찌 지나친 은전을 구분없이 베풀어 후일의 폐란을 열어놓습니까?(<선조실록>, 23년 12월 조)

허준에 대한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가 계속되었으나 선조의 그에 대한 신뢰는 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는 의주 파천길에 그를 데려갔다. 전란 후 조정은 허준을 호성공신 3등에 품계하고 양평군(陽平君)이라는 공신칭호를 내렸다. 이어서 1606년에는 최고 품계인 정1품 보국승록대부가 주어졌다. 일개 의관에게 주어진 이같은 품계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사간원과 사헌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사헌부는 "후세의 웃음거리가 된다"면서 품계를 취하할 것을 제의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607년 겨울 선조가 쉰여섯 살로 숨을 거뒀다. 의관의 최고 책임자 허준이 마지막 수단으로 극약처방을 썼으나, 노쇄한 임금은 살아나지 않았다. 신료들이 사방에서 들고 일어났다. 허준에게는 막아줄 방파제가 사라졌다.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잇따랐지만 세자 시절 그의 치료로 살아남은 새 군주 광해군은 유배 조치로 마무리했다.

의주로 귀양간 허준은 그동안 틈틈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동의보감>을 저술했다. 자신은 비록 임금의 주치의가 되어 호의호식하고 살았지만 7년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또 전란 이후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힘 없는 백성들이 무수히 병들고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질병을 고치는 데 남은 생을 바치겠다면서 치료와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식에 접한 광해군이 1609년 해배와 함께 다시 서울로 불러 <동의보감>의 완간을 부탁했다. 1년 후인 1670년 허준은 71살의 나이로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했다. 일반 백성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 <동의보감> 서문에서 간행의도를 제시했다.

1) 중국의 의방서가 모두 초집·용쇄(抄集 庸瑣)하여 만족스럽지 못하니 제방(諸方)을 모아서 완전한 책으로 만든다.

2) 모든 질병은 불섭생에서 생기므로 수양이 먼저이고 약석(藥石)은 다음 가는 것이니 제방서들의 번거롭고 잡다한 가운데서 요점만을 따낸다.

3) 우리나라에 국산약재, 즉 향약(鄕藥)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몰라서 쓰지 못하니 옳게 분류하고 향명(鄕名)을 아울러 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활용하기 쉽게 한다.

허준은 천대받던 서얼 출신으로 당상관이 되고 어의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주치의가 된 것이다. 많은 외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당상관의 위상은 양반 출신 사간원·사헌부 간관들의 질타를 한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였다.

그가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나라에는 각 고장에서 나는 약재가 많은 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쉽게 알리고 이용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퇴임 후에도 쉬지 않고 백성들 곁에서 일하였다.

<동의보감>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라든가 우리 고유의 용약법이 '속방(俗方)'이라고 하여 많이 올라있다. 종래의 우리의 의학서적이 모두 중국어인 한문으로 되어 있어 널리 보급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허준은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용> 등을 간행한 것도 허준의 큰 업적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허준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정신으로 우리 국민에게 가장 알맞은 의학체계를 수립하는 데 생애를 바친 국학자라고 할 수 있다.(홍문화, <허준>)

의성으로 또는 조선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리는 그는 이타적 삶을 산 대표적인 의료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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