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태블릿으로 클라우드로부터 데이터를 다운로드받는 최초의 사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에 일어났다.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석판에 신의 계명을 내려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받은 계명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계명을 엄수(嚴守)하는 이들이 이 나라에도 있다. 국민의힘에 모여 있다. ‘KKH’(고대 근동에선 자음만 표기했다)라는 이름이 호명되면,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난다. 바로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 호들갑을 우리는 라이브로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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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문제 감싸기 급급 친윤들
결국 공천 겨냥한 움직임 아닌가
정권 재창출이 곧 대통령의 성공
리스크 적당히 덮고 갈 수는 없어
」
여사님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 좀 하면 안 되는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이 선출한 대통령을 ‘히틀러’라 불러도 된다. 그런데 선출되지도 않은 여사의 이름만 나오면 단체로 경기를 일으킨다. 대체 왜들 그러는가?
요 며칠간의 사건은 그동안 항간에서 의심하고 우려했던 여사의 ‘권력화’가 실체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불편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대통령도, 대통령실도, 당의 대표 역할을 하는 이도 여사의 권력을 견제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내치려는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는 것. 그동안 그를 ‘윤석열 아바타’, ‘X세대 윤석열’이라 비난해 왔던 민주당은 머쓱해졌다. 아울러 문제가 된 수직적 당정 관계를 어느 정도 수평화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사님은 여전히 ‘절대 사과는 못 한다’는 입장이시고, 친윤 의원들은 외려 여사님을 모독한 김경율 비대위원을 내치라고 아우성이다. 한 비대위원장이 거둔 1승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여사가 사과를 거부하고 김 위원을 내치면 그 성과마저 무로 돌아간다. 이번 사건은 전초전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갈등은 공천 과정에서 터져 나올 게다. 성공하려면 한 비대위원장이 공천을 주도해야 하나, 그분들이 이를 좌시하겠는가.
대통령은 당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표를 몰아내고, 지지율 2%짜리 후보를 새 대표 자리에 앉히고, 그러다 당이 망가지자 최측근을 비대위원장으로 데려왔다가 그마저 말을 안 듣는다고 내치려 한 것 아닌가.
이번 일을 키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대통령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이들이다. 지금이 무슨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이 따로 존재하던 조선 시대인가? 한 비대위원장의 말대로 “당은 당의 일을 하고, 정부는 정부의 일을 하면 된다.”
‘대통령의 사람’ 혹은 ‘여사님의 사람’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이들이야말로 당을 망치고, 결국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통령직의 성공 여부는 결국 정권 재창출에 달린 것이다.
여사님의 사람들은 외친다. ‘여사님은 공작정치의 희생자다.’ 피해자라서 사과를 할 수 없단다. 그래, 여사님은 공작정치의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300만 원짜리 백을 왜 받는가? 남편이 대통령이 아니라 일개 검사라도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여사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권력의 크기는 여사님과의 거리에 반비례하다’는 법칙에 따라, 다른 이들은 ‘여사님 심기를 거스르면 공천을 못 받는다’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친윤’이 자기를 영원히 지켜줄 거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게다. 닭이 한번 울기도 전에 배반할 이들이 그들이다. 탄핵국면에서 박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들”, 그 많던 ‘진박’은 다 어디에 있었던가. 대통령의 유일한 보험은 정권 재창출이다.
고로 한동훈 비대위의 승리가 대통령의 승리라 생각해야 한다. 예수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돌리라 하셨다. 즉, 당무는 비대위원장에게 맡기고, 대통령실이 이른바 ‘메신저’를 통해 공천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냥 당이 당의 일을 하고, 정부가 정부의 일을 하면 된다. 지금 이 위기도 이 상식을 깨뜨린 결과로 발생한 게 아닌가. 억지로 제 사람들 심으려 해봤자 위기만 커질 뿐이다. 일단 비대위원장에 앉혔으면 그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
친윤들의 희망과는 달리 ‘KKH 리스크’는 적당히 덮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사태로 국민들의 의구심은 외려 더 커진 상태. 그 우려와 의심을 그 일을 처리하는 데서 한동훈 비대위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해 줘야 한다.
대통령이 영부인을 일방적으로 싸고도는 모습도 그만 보고 싶다. 국민은 여사라는 리스크 덩어리를 공적 감시 아래 두고 싶어 한다.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는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지, 국민의 뜻을 거슬러 아내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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