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묵의 과학 산책] 무명필
직업이나 일상생활에 쓰이는 도구는 성능뿐 아니라 생김새도 중요하고 사람마다 선호하는 것이 다르다. 성능이야 당연히 중요하지만 생김새의 경우 여러 가지 심리적 측면이 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도구를 쓴다는 만족감, 그리고 남들에게 은근 자랑하고 싶은 마음. 인간의 사회성 내지 허영심이 도구 선택의 주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글은 대부분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쓰지만 수식 계산은 손을 놀리는 것이 최적이라 이론 과학자들에게는 필기구가 중요하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이론과학 연구소인 고등과학원에서 교수들과 선호하는 필기구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H 교수는 M사의 젤펜을, L 교수는 B사의 볼펜을, 그리고 P 교수와 나는 연필파였다. 균일하게 써진다, 볼펜 똥이 안 생긴다, 쓸 때 촉감이 좋다 등 이유도 다양하다. 더 세밀히 나아가 P 교수는 B’사의 (B와 B’은 다르다) 고급 연필, 나는 아주 보편적인 D사의 연필을 쓴다. B’사의 연필은 찾아봤더니 색깔의 짙기에다 마찰 정도까지 세분화된 정교한 제품이었다. 필기류는 주로 연구실에 혼자 있을 때 쓰고 들어가는 비용도 1년에 몇 백에서 몇 천원 선이니 비싼 것 쓴다고 자랑할 일은 없다. 어떤 측면에서건 쓸 때 자신에게 익숙하고 집중해서 일 할 때 안정감을 주는 것이 주요 선택 기준이리라.
내가 D사의 연필을 쓰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쓰다 남긴 수많은 연필 중 진함과 촉감이 맞아서이다. 이것들 쓰느라 새 연필을 사려면 멀고 멀었다. 길이 1.5㎝ 이하가 될 때까지 쓰는데, 연필이 아주 짧아지면 칼로 깎아야 한다. 이 작업은 자그마한 의식과 같아, 일하던 중 마음에 환기도 시켜준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선호하는 붓은 있을 수 있다. 각자의 선택 기준에 성능과 미감과 사회적 허영심 등이 어떤 비중으로 섞여 있는가는 생각해 볼 만하다.
황원묵 미국 텍사스A&M대 생명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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