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세 차례 침공... 강감찬이 끝내 전면전 택한 이유
[이준목 기자]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 麗遼戰爭, 993년-1019년)'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강국이자 대제국이었던 거란(요나라)의 세 차례에 걸친 침공을, 고려가 끝내 격퇴해낸 전쟁이다. 최근 방영중인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바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며 시청자들에게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고려거란전쟁은 한국사에서 정치-외교-군사적인 면을 통틀어 오직 자력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가장 빛나는 모범사례로도 꼽힌다. 선조들은 어떻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을까.
▲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 tvN |
1월 2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5회에서는 '대제국의 침공, 드라마로 본 고려거란전쟁'을 통하여 여요전쟁의 진실과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했다. 권용철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거란(契丹, 원음은 키탄 혹은 키타이)은 본래 동아시아 북방에서 오래전부터 거주하던 몽골계통의 유목민 집단에서 출발했다. 중국 변방의 바린좌기와 시레무렌강 지역에 머물던 여러 개의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거란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300년대) 중엽부터다.
거란족은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유목생활을 해야 했는데, 부족한 자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약탈'문화가 보편적인 생존의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곡물과 재물은 물론 가축과 사람까지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중국에서 집필한 '북사-거란열전'에 따르면 "거란은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부모가 죽어서 슬프게 우는 것을 씩씩하지 않다고 여긴다"고 서술하며 거란인들의 호전성을 강조했다.
거란인들은 어릴때부터 승마술과 궁술에 능했고, 말을 타고 사냥과 약탈을 일삼으며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 속에서 전쟁기술을 습득하는 '전투민족'이 됐다. 거란인들의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파르티안 샷'이다. 말을 탄 기수가 이동중 몸을 돌려 추격해오는 적에게 화살을 쏘는 기술로, 말에 탑승하여 흔들리는 상태로 상체를 돌리고 활을 쏜다는 것은 승마와 궁술 모두 초일류의 기술과 근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거란족은 스스로를 '강철과 칼의 민족'이라고 자부할만큼 전투력에 대한 자긍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며 질랄부의 추장이었던 야율야보기(872-926,요 태조 천황제)가 분열되었던 거란의 8개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요나라를 건국하여 거란 최초의 황제가 된다. 야율야보기는 유목민족의 정체성과 강인함을 살려 이동식 행궁인 '날발'을 짓고 일정 기간마다 수도를 옮겨가면서 주변국을 압박하고 군사력을 과시했다. 또한 야율야보기는 거란 문자를 창제하고 불교를 국가로 지정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세력이 점점 커진 거란은 926년 동아시아의 강국이던 발해를 멸망시켰고, 936년에는 중원으로 진출하여 후진과 거래를 맺고 연운 16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란이 연운 16주를 확보한 것은 북방민족으로서는 최초로 만리장성 이남에 교두보를 두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요충지를 확보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거란은 중국이 당시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기에 빠진 틈을 타 북방의 패자로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960년 송나라(북송)가 건국되어 중원을 통일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거란은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 송나라는 연운16주를 되찾기 위하여 거란과 수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당시 거란은 6대 황제 야율융서(요 성종 972-1031)가 집권하고 여걸로 꼽히는 어머니 승천태후가 섭정을 맞이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거침없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부상한 거란이 주목한 또 하나의 나라가 바로 고려였다. 본래 고려는 건국 초기에 거란과 큰 접점이 없었으나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당하면서 양국은 자연히 국경을 직접 마주하게 됐다. 고려는 같은 민족이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자연히 적대했다.
942년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를 크게 악화시키는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다. 거란은 고려와 화친을 맺기 위하여 사신과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다. 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의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냈고, 선물로 데려온 낙타는 모두 만부교 밑에 묶어서 굶겨 죽였다. 왕건의 이례적일만큼 과격한 조치는, 거란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발해로부터 건너온 유민들의 여론을 고려한 정치적 제스처로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국력이 급성장하던 거란을 자극한 왕건의 외교적 무리수는, 이후 거란이 세차례나 고려를 침공해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야율융서가 집권하기까지 40년간 교류가 단절되었다. 왕건은 사후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 십조'에서도 거란을 멀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거란은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배후에 있는 고려가 송과 손을 잡을 것을 경계했다. 거란은 먼저 고려를 굴복시켜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993년(성종 13년), 장군 소손녕에게 대군을 맡겨 고려를 침공하게 하니 1차 여요전쟁의 시작이었다.
거란군은 봉산전투에서 고려군을 물리치고 기선을 제압했다.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 사절을 보내어 거란의 대군이 80만이라고 주장하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소손녕의 허풍이었다. 실제 소손녕의 직책이나 거란의 상황을 감안할 때 1차 여요전쟁때 동원된 거란군은 많아야 약 6만에서 15만으로 추정된다. 거란은 고려를 완전히 정복할 정도의 병력을 갖추지는 못했고 군사적인 위협을 통하여 고려를 단기간에 굴복시키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고려 조정은 화친파와 항전파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다. 거란에 영토를 떼어주고라도 화친을 맺자는 여론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반기를 든 인물이 서희(徐熙, 942-998)였다. 그는 거란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위협만 하는 것을 보고 거란의 속내를 간파했다. 서희는 직접 목숨을 걸고 거란의 군중으로 찾아가 소손녕과 외교담판을 벌였다.
서희는 "여진족이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도적질을 하며 길을 막고 있다. 고려가 강동 6주의 여진을 토벌하게 해준다면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겠다"고 제안한다. 어차피 고려와 화친을 맺는 게 목표였던 소손녕은 이를 수락했다. 고려는 이후 거란과 형식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거란의 묵인 하에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 건설된 흥화진, 귀주, 곽주, 통주,용주, 철주 등은 2,3차 여요전쟁에서 두고두고 거란의 발목을 잡는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 먼저 침공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로 적을 몰아내고 오히려 영토가 늘어나는 기적을 이뤄낸 '서희의 외교담판'은 지금도 전략적 실리외교의 모범사례로 꼽히며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칭송받고 있다.
1009년,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폐위된 후 시해당하고, 현종이 즉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거란과 고려는 형식적이나마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왕이 바뀌려면 거란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다. 거란의 성종 야율융서는 송과 거란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고 있던 고려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강조의 정변은 때마침 침공을 위한 절호의 명분이 되어준 격이었다.
거란은 이듬해인 1010년 6월, 황제인 야율융서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침공한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공중 최대 규모이자 고려가 가장 멸망의 위기에 근접했던 2차 여요전쟁이다.
강동 6주를 통하여 침공해온 거란은 가장 먼저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을 공략했다. 그런데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고려장수는 서북면 도순검사(지역방어지휘관)인 양규(楊規)라는 인물이었다.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불과 3천여 명의 병력으로 거란의 40만 대군에 맞서 끝까지 흥화진을 사수해냈다.
첫 전투에서 결국 흥화진을 점령하는데 실패한 거란군은 소수의 병력만 남겨놓고 방향을 선회하여 통주로 향한다. 고려의 권신이자 최고사령관인 강조는 거란의 침공에 맞서 고려의 모든 주력군이라고 할 수 있는 30만대군을 모아 직접 출진한 상태였다.
강조는 전투 초반에 평야에서 거란의 기병에 맞서기 위하여 제작한 첨단우기인 '검차'를 앞세워 거란군을 몇차례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거란군은 검차에 맞서기 위하여 기병 대신 중무장 보병들을 투입하여 검차를 뛰어넘어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고려군은 결국 통주전투에서 대패했고 방심하던 강조는 거란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강조는 거란의 항복권유를 끝내 거부하고 고려의 신하로 남을 것을 자처하다가 처형당한다.
고려의 주력군을 궤멸시킨 거란군은 이후 서경(평양)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거란군은 서경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경신사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거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렸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자세한 내용과 과정은 알려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고려가 어떻게 서경을 지켜냈는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학계에서는 고려군 결사대가 기습으로 거란군을 물리친 전공을 신비롭게 포장해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있다.
이에 거란은 현종이 있는 수도 개경을 직접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발해를 멸망시킨 것처럼 수도를 점령하여 국왕만 잡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거란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배후에 흥화진이나 서경을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거란으로서도 자칫 적지에서 포위될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감수한 도박이기도 했다.
현종은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일단 개경을 떠나 몽진을 결정한다. 당시 중앙집권체계가 아직 갖추어지지 못했고 황제의 권위가 약했던 고려에서, 현종은 몽진중 여러 차례 거란군이 아닌 지방 호족들에게 수모를 당하거나 죽음의 위기까지 몰리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거란군은 1011년 1월, 수도 개경을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목표였던 현종은 이미 도피한 상태였고 전쟁이 길어지며 군수물자 보급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며 거란은 오히려 난관에 봉착했다. 고려는 사신을 보내 현종의 친조(왕이 상국의 조정에 나아가 인사를 올리는 것)를 조건으로 거란의 철군을 요청한다. 거란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고려의 외교적 기만술이었다. 사정이 다급했던 야율융서는 일단 이를 수락하며 친조를 명분으로 철군을 결정했다.
하지만 거란은 보복으로 개경의 궁궐을 불태우고 무수한 재물과 포로까지 약탈해갔다. 이로 인하여 고려 초기의 역사 기록이나 문화재 등이 대거 소실되는 피해를 겪어야 했다.
고려군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곱게 돌려보내지 않았다. 특히 양규와 김숙흥은 약 1700여명에 불과한 군사들을 이끌고 약 7번의 전투를 치르며 거란군을 물리치고 3만 여명에 이끄는 포로를 되찾았다.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거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고려사> 94권 '양규열전'에 따르면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달 사이 일곱 번 싸워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명의 백성들을 되찾았다. 양규와 김숙흥은 거란군과 싸우다가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고 그들의 활약상과 최후를 기술하고 있다.
거란은 표면적으로 친조를 약속받기는 했지만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공한 것에 비하여 실질적인 소득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했다.
분노한 야율융서는 이를 명분으로 하여 세번째로 고려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1018년 야율융서는 소손녕의 형인 백전노장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맡기며 3차 여요전쟁이 발발한다. 황제가 직접 친정했던 2차 여요전쟁에 비하여 규모는 줄었지만 소배압의 군대는 황제의 친위대인 피실군으로 구성된 최정예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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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서 고려군을 이끈 장수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었다. 본래 문신이었던 강감찬은 3차 여요전쟁 이전까지 공식적인 기록에서 군권을 잡아본 경험이 전무했고 나이도 무려 칠순이었다. 하지만 군사적 안목과 능력도 탁월했던 강감찬은 현종에 의하여 서경유수와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역임하여 거란의 재침공에 대비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강감찬의 고려의 주력군은 흥화진 인근의 삼교천(三橋川) 전투에서 수공으로 거란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는 미끼였고 거란의 주력군은 고려군과의 전면전을 피하여 수도 개경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수도를 급습하여 국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전략은 전쟁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이를 성공시킨 것이 거란의 발해 멸망, 그리고 조선 시대에 청나라가 침공했던 병자호란 등이다.
여러 번의 침공 경험을 통하여 고려의 대응과 지리를 어느 정도 간파한 거란군은, 강감찬의 주력군을 따돌리고 빠른 속도로 개경에 근접한다. 하지만 현종은 이번에는 몽진 대신 수도에 끝까지 남아 결사항전을 선택했다. 현종은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쳐 개경인근에서 적이 사용할만한 군수물자와 식량을 모두 소멸시켰다. 이는 약탈을 통하여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하던 거란의 최정예 기병대인 '타초곡기'에게 가장 큰 타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란군은 수도까지 급하게 올라오느라 지친 상태였고 보급은 불가능해진 데다 배후에는 강감찬의 고려군까지 추격해오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였다. 소배압은 결국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개경 공략을 눈앞에서 포기하고 철군을 선택했다.
쫓고 쫓기던 양군은 결국 귀주에서 최후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강감찬은 놀랍게도 거란의 정예군을 평야에서 정면으로 상대하는 회전을 선택했다. 여기서 거란의 주력군을 완전히 섬멸해놓지 못하면 언제든 힘을 추슬러 다시 침공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거란의 거듭된 침공에 피폐해져가던 고려로서도 국운이 걸린 결전이었다.
한창 일진일퇴의 승부를 벌이던 중 초반에는 풍향이 고려군에 불리했으나 거란쪽으로 바람이 바뀌면서 고려군의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검차를 앞세워 거란이 자랑하던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해냈다. 여기에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의 정예 기병대 1만이 뒤늦게 도착하여 배후에서 거란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거란의 최정예군은 고려군에게 섬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따르면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 말과 낙타, 갑옷과 무기를 헤아릴 수 없었다"며 고려군의 대승을 기록하고 있다. 소배압은 10만여명의 대군중 불과 수천명을 이끌고 간신히 살아남아 거란으로 도주했다. 바로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히는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이후 거란은 두 번 다시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다. 26년간 세 차례의 전쟁에서 끝내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한 거란은 동아시아 제일의 패권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그 틈을 타 여진족 등이 흥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거란은 야율융서 사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여요전쟁 이후 약 100년만인 1125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을 받아 끝내 멸망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거란족은 두 번다시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세력을 재건하지 못했다. 여요전쟁이 거란의 전성기에 제동을 거는 상징적 분기점으로 남게 된 것이다.
"좋은 전쟁, 나쁜 평화란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격언이다. 거란을 물리치고 멸망의 위기에서 살아난 고려는 이후 100여년에 걸쳐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이후 동아시아는 고려와 거란, 송나라가 각자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하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다. 고려가 '승리로 쟁취한 평화'를 통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역사까지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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