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 불가 외담대 만기까지 늘려"…태영 납품업체들 '돈맥경화'
만기 이전 현금화 안돼… 자재업체 유동성 고갈
태영건설의 자재 납품업체들이 하도급 대금 미지급에 따른 '돈맥경화' 위기에 처했다. 통상 하도급 대금 지급을 위해 활용하는 전자어음이 아닌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외담대) 대금을 지급하던 태영건설이 최근 일방적으로 대출 만기일을 연장하고, 할인이 불가능한 외상매출채권을 발행하면서 납품업체들이 유동성 절벽에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원도급사가 하도급 대금을 60일 이내 지급하도록 한 현행법과 달리 대금 지급일이 90일까지 밀린 데다 태영건설의 납품업체들이 다른 건설사 현장에도 자재를 공급하고 있어, 유동성 고갈의 여파가 건설업 전반에 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태영건설 외담대 현금화 안 돼…자재값·인건비 걱정"
24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태영건설의 한 공사현장에 자재를 납품하는 A업체는 지난해 11~12월분 대금 5억원가량을 받지 못했다. 이 중 11월분 외담대는 태영건설이 세금계산서 기준 만기 일정을 기존 60일에서 90일로 늘렸다. 이로 인해 A업체는 만기 이전에 현금화도 할 수 없어 다음 달 말까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채 채권을 쥐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외담대는 협력업체가 원도급사가 발급한 외상매출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아(현금화) 자재값, 인건비 등을 충당하는 결제 방식이다. 원도급사는 채권 만기일에 은행에 대금을 납부하는데 만기를 넘기면 대출금 연체로 처리된다. 이때 상환청구권이 있는 외담대일 경우 은행은 협력업체에 대금을 청구할 수 있다. 즉 원도급사 대신 협력업체가 대금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원도급사가 만기를 지키지 못하면 부도 처리되는 전자어음과 차이가 있다.
A업체 대표는 "통상 납품 익월에 외담대를 받아 이를 할인해서 (만기 전에) 현금화해 왔다. 그런데 지금 태영건설에서는 할인이 불가능한 외담대를 끊어주면서 만기도 늘려버렸다"며 "11월분 외담대 현금화를 위해서는 꼼짝없이 2월 말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월분이라고 다르겠나. 외담대 만기가 3월로 잡히지 않겠느냐"며 "시공 현장 근로자들의 임금 체불도 문제지만, 자재를 납품하는 협력업체들도 챙겨야 할 식구가 많다. 1월은 어떻게 버텨도 2월부터는…"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나마 상환청구권이 없는 외담대여서 다행이라고 했다.
태영건설은 이미 유동성 위기로 임금 체불 등 혼란이 발생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태영그룹 관계자는 "서울 성동구 청년주택 근로자 임금 문제는 외담대 결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워크아웃이 개시되면 최우선 변제할 것"이라고 했다.
외담대 미상환 파장 우려…"태영이 우선 책임져야"
태영건설이 외담대를 연체이자만 물면 되는 금융채권으로 떠넘긴 탓에 협력업체들은 실망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외담대가 상거래채권으로 분류되면 바로 지급해야 하나, 금융채권으로 넘긴 상황이라 태영건설과 채권단과의 협의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다만 하도급 대금 지급이 늦어지면 유동성 위기에 몰리는 것은 태영건설이 아니라 영세한 협력업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중론이다. 태영건설의 자재 납품업체들은 다른 건설사에도 납품하는 만큼 다른 현장으로 유동성 위기의 불꽃이 튈 가능성이 크다. 태영건설은 지난해 12월 29일 만기가 돌아온 1485억원의 상거래채권 중 외담대 451억원을 상환하지 않았다.
건설공제조합 하도급 대금 지급보증 등을 통해 추후 대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때까지 협력업체들이 기다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공제조합은 오는 4월 열릴 제2차 금융채권자협의회 전에 태영건설이 책임지고 외담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외담대는 일차적으로 태영건설이 갚아야 한다. 성공적인 워크아웃을 위해서는 태영건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전했다.
태영건설이 '하도급법'을 어겼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법은 원도급사가 하도급대금을 60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태영건설이 60일이던 외담대 만기를 90일로 늘렸으니 '공정 거래'를 어겼다는 것이다. 대형 건설사들은 지급 강제성이 있는 전자어음을 주로 사용해 하도급 대금 체계가 안전한 반면, 태영건설이 외담대를 입맛대로 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실제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늘 전자어음으로 협력업체와 거래해 왔다. 외담대는 써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은 지난 22일부터 삼일회계법인을 통해 태영건설 자산 실사에 착수했다. 30여명으로 구성된 실사팀은 3개월간 개별 사업장을 실사한 뒤 유지 또는 정리 여부를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태영건설의 존속가치가 낮다고 결론 나면 워크아웃은 중단되고 태영건설은 청산·파산할 수 있다.
노경조 기자 felizk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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