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 역할, 자신의 삶 사는 모습 표현하고 싶었다"

장혜령 2024. 1. 24. 10: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우 배우

[장혜령 기자]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우 배우
ⓒ (주)엔케이컨텐츠
 
1월 22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임선우와 인터뷰했다. 들어서자마자 압도되는 듯했다. 마치 유진이 앉아 있는 듯 아름다운 얼굴과 정갈한 자태로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야기 나눠보니 유진의 까칠한 성격과는 반대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추위마저 녹여내고 있었다.

<세기말의 사랑>은 세상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유롭게 쓰이면서 다양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데뷔작 < 69세 >의 임선애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아 3년여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임선우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녔다. 2017년 <더 테이블>로 데뷔해 단편을 거쳐, 영화 <침입자>(2020), <연애 빠진 로맨스>(2021), <비밀의 언덕>(2023) 등 조금씩 영역을 넓히며 주목받아 왔다. 드라마 <나의 해피엔드>에서는 신경정신과 의사를 맡아 변신에 성공했다.

최근 장편영화 필모그래피를 보면 레트로 열풍의 선두주자다. 1990년대와 2000년 대 초반 작품이 여럿 겹친다.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의 담임 애란을 연기해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있었을 법한 교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허당 선생님이었다. <우라까이 하루키>에서는 장만옥 역할을 맡아 능청스러움을 발산했다. <세기말의 사랑>에서는 1999년에서 2000년을 배경으로 장애인의 편견을 탈피한 독특한 인물을 연기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인상적인 전신마비 캐릭터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일 터. 임선우는 "장애 설정이 초반에는 크게 다가왔지만 시나리오를 읽는 도중 범상치 않는 인물이라 욕심났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촬영할 때는 무조건 달려들었는데 몰라서 용감했던 거였다. 지나고 보니 비중보다는 준비할 게 내외적으로 많았던 캐릭였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장애 있지만 나로서 살아가려는 유진을 연기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
ⓒ (주)엔케이컨텐츠
 
- 유진은 병명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어떻게 아프기 시작했는지 등 전사가 감춰진 신비로운 여성이다. 내외적으로 상당한 준비 없이는 함부로 뛰어들 수 없는 캐릭터다.
"유진은 국가 보조금도 있지만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여성이다. 냉장고에 붙은 팸플릿을 영미가 보는 장면에서 짧게 지나간다. 한마디로 '얼굴로 먹고사는 여자'다. 잡지나 팸플릿 모델이라 외적으로 준비 사항이 있었다. 색 입히지 않은 자연 생머리였다. 특히 말하는 태도가 중요했고 사람 대하는 태도 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하무인인 것은 스스로 방어하느라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다. 그러다가 영미를 만나 점점 무장해제된다. 마지막 도영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잘 몰랐던 맨얼굴이 툭하고 튀어나온다."

- 유진은 장애인의 여러 이미지를 탈피한 독특한 인물이다. 실제 임선애 감독의 친척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들었다.
"이모님은 일단 꼿꼿하게 한 인간으로 앉아 계셨다. 호탕한 웃음으로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살아온 이야기, 장애 때문에 벌어지는 일상생활 에피소드 등등. 극 중에서 유진이 모기를 무서워하는 건 이모님을 참고했다. 도우미가 오후 6시에 퇴근하면 다음 날 아침 출근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도 포함이다.

이모님을 참고했지만 유진은 허구의 인물이지 이모님이 절대 아니다. 만나서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 직접 하지 못했다. 막상 대화를 해보니까 자잘한 질문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이모님을 보며 제약이 있어도 자신의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걸 유진의 태도에 반영했다."

- 내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장면이 많아서 상대를 보고 연기할 수 없었을 텐데 어려웠을 것 같다. 특히 영미 역의 이유영과 자주 붙어 있어 호흡도 잘 맞아야 했겠다.
"저만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연기할 수 없었다. 장애만 생각했지 의외의 복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고 후회했다. 관객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수평적인 관계를 고려해 촬영했다. 누가 누구를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앵글이 없다. 그래서 상대가 주는 기운이나 분위기만 듣고 의지해야 했다.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작업이라서 그만큼 재미있었다. 그때는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상상만 했었는데 영화를 직접 보니까 표정이 매칭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유영 배우는 처음 만났지만 호흡이 좋다고 단박에 느꼈다. 서로 의지하면서 찍었던 기억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유영 배우가 좋은 연기를 펼쳤다고 생각 들더라. 어느 순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졌다."

- 유진은 도영과 법적 부부이고 영미도 도영의 공금횡령을 대신 갚아 줄 정도로 마음에 둔다. 대체 두 여성이 도영을 왜 좋아하는 걸까.
"(웃음) 노재원 배우는 소풍 장면에서 처음 만났는데 우직한 성격이라 유진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기말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큰 테두리의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미, 유진, 도영 모두 소외된 인물이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도록 설정한 것 같다. 확실히 유진은 도영을 좋아하고 도영도 유진을 좋아한다고 봤다."

유진을 위해 모두 쏟아부었고, 새롭게 채우고 싶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우 배우
ⓒ (주)엔케이컨텐츠
 
- 임선애 감독은 '얼굴에서 그 너머의 얼굴을 발견했다'고 했고 김초희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건져 올린 보석'이라고 극찬했다. 과연 그게 무엇일지 짐작 가는 게 있나. 강단 있어 보이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보인다. 작품 선택의 선구안이 있다.
"일단 칭찬 감사하다(수줍은 웃음). 선택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시나리오가 중요하고 읽다 보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하려고 한다."

-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직장 다니다가 삼십 대에 한예종 연극학과 예술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연극, 연기과가 아니라 의아하다.
"갑자기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연기가 궁금했다. 어떤 시기가 되니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신기했다. 당시 재직 중이었고 완전히 배우로 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아 불안했다. 퇴사 생각이 없어서 일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학과를 찾았던 거다. 연극 제작이나 기획 방향에 관심이 있어 예술경영학과를 선택했다. 지나고 보니 결국 연기를 하려면 온전히 시간을 던져야 함을 재학 중에 알게 되었고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 배우는 자신을 대중에게 태우면서 서서히 소진되어 간다. 여러 캐릭터를 거치다 보면 지치는 순간이 올 텐데 에너지 충전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
"나도 다른 배우가 뭐 하면서 쉬는지 알고 싶다(웃음). 배우끼리 만나면 '뭐 하고 쉬냐' 서로 물어본다. 답변은 다들 비슷하다. 운동, 여행, 영화관람 등. 결국 새로운 걸 배우면서 부족한 점을 채워간다. 작품 없을 때는 24시간이 내 시간이지만 막연해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 다들 발악하면서 보내지 않나 싶다(웃음). 결국 저는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니까 정답은 없겠다. 그때마다 어떤 화두를 던지면서 정답을 조금씩 찾아가는 것 같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우 배우
ⓒ (주)엔케이컨텐츠
 
- 다들 쉴 때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끊임없이 배우더라.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 중에 인상적이었거나, 욕심났던 캐릭터가 있을 것 같다.
"요즘 무엇을 봤더라... 음... 많이 봤는데... (웃음) <크레센도>를 봤다. 다들 임윤찬 피아니스트를 중심으로 보겠지만 저는 다른 피아니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경연 줄에 세우는 게 어불성설이다. 영화 속 인터뷰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음악가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고 자기 언어로 이야기할 줄 알더라. 나중에 피아니스트 역할이 제안 왔을 때 녹여내고 싶다고 생각해 봤다."

- 연기 말고 요즘 무엇에 빠져 있는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나 집 주변에서 운동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동네 수영장이 폐업했고, 뭘 할까 고민하다가 이스라엘 특공무술 크라브마가를 배우게 되었다. 벌써 2년 차다. 코치님이 일주일에 2번만 하더라도 꾸준히 하면 된다는 격려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최근에는 다섯 시간 동안 6명이 승급시험 봐서 노란 띠가 되었다. 복싱, 발차기, 레슬링 기초, 맨손 호신술, 무기 대처 등을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더라.

아,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는 중국어 회화학원에 간다. 예전에 연변 캐릭터를 맡아서 잠시 중국어를 했던 적도 있다. 언어는 쓰지 않으면 까먹어서 또 배우고 있다. 그리고 일지까지는 아니고 촬영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간단하게 적어 둔다. 배우로서 답변도 좋지만 누가 안 해주면 스스로라도 늘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아 짧게 쓰고 가끔 들여다본다."

- <세기말의 사랑> 유진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게 되었다. 이제 확실히 각인되는 배우로 남을 것 같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깊이 생각 안 해 봤다. 그저 유진을 하면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작년에 촬영 끝나고 나서 몇 달 동안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다 쏟아부어 버렸더니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연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막막했다. 무언가에 몰두한 경험은 흔치 않아 걱정했었는데 관점을 바꾸니까 좋았다. 새로 시작하기 딱 좋을 때다. 아직 작품 예정은 없고 드라마도 촬영 끝나서 쉬고 있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직업적 사이클이 중요하다기보다 저를 온전히 던질 캐릭터를 만나면 언제든지 도전하고 싶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