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시설 환경오염 피해 '상당한 개연성' 증명하면 배상해야"

최석진 2024. 1. 2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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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시설의 설치·운영으로 인한 환경오염 피해의 인과관계는 시설에서 배출된 오염물질 등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다고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 입증으로 충분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처음 나왔다.

그동안 대법원은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해 기업이 유해물질을 배출한 사실과 그 유해물질이 피해자에게 도달한 사실 및 피해의 발생을 피해자가 각각 증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는데, 피해자의 증명책임을 대폭 완화한 판결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황모씨 등 19명이 반도체용 화학제품 제조업체인 램테크놀러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각 원고들에게 700만원씩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손해배상책임에 있어서 인과관계 인정과 증명책임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상고를 기각한 이유를 밝혔다.

황씨 등은 램테크놀러지가 운영하는 충남 금산의 공장에서 2016년 6월 4일 발생한 불산 누출 사고로 두통과 호흡기 질환 등을 앓았다며 2017년 2월 회사와 국가를 상대로 각자에게 2000만원씩을 공동으로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한 반면, 회사에 대한 청구를 일부 인용해 각 원고들에게 500만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불산 누출 사고로 인한 원고들의 직접적인 신체적 피해나 신체적 피해로 인한 정신적 피해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불안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가해행위로 인해 직접적인 신체적 피해나 신체적 피해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해행위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통해 순수한 정신적 고통을 넘는 심리적 건강 침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경험칙상 가해행위로 인해 정신적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라며 "경험칙상 원고들이 이 사건 공장의 설치·운영으로 인해 순수한 정신적 고통을 넘는 정신적 손해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배상액을 각 700만원씩으로 늘렸다.

재판부는 "공장에서 유출된 불산이 기체 상태로 공기 중으로 확산됐다가 지표면으로 낙하해 원고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고 볼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으므로, 이 사건 사고와 원고들에게 발생한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다"라며 "따라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이 사건 사고로 인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환경오염피해구제법 제9조(인과관계의 추정) 1항은 '시설이 환경오염피해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때에는 그 시설로 인하여 환경오염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조 2항은 '1항에 따른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시설의 가동과정, 사용된 설비, 투입되거나 배출된 물질의 종류와 농도, 기상조건, 피해발생의 시간과 장소, 피해의 상태와 그 밖에 피해발생에 영향을 준 사정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고 정했다.

그리고 같은 조 3항은 사업자가 이 같은 인과관계 추정을 깨기 위해서는 피해가 다른 원인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을 입증하거나, 관계 법령과 인허가 조건을 모두 준수하고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등 사업자의 책무를 다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정했다.

한편 불산 유출 사고를 수사한 대전지검은 ▲사고 발생 당시 바람이 마을에서 공장 방향으로 불고 있었던 점 ▲피해자들의 소변검사에서 불산이 검출되지 않은 점 ▲불화수소가 공기보다 가벼운데, 공장의 지대가 마을보다 높은 점 등을 근거로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를 받던 램테크놀러지와 소속 직원들을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불화수소는 체내에 유입되더라도 대부분 24시간 이내에 소변을 통해 체외로 배출되므로, 원고들의 소변검사에서 불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원고들이 호소하는 증상이 이 사건 사고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이 같은 2심의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환경오염피해구제법의 입법 목적과 취지, 관련 규정의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환경오염피해에 대해 시설의 사업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묻는 경우, 피해자가 법 제9조 2항이 정한 여러 간접사실을 통해 전체적으로 봐 시설의 설치·운영과 관련해 배출된 오염물질 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및 재산에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그 시설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추정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때 해당 시설에서 배출된 오염물질 등이 피해자나 피해물건에 도달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직접 증명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장에서 누출된 불산은 기체 상태로 공기 중으로 확산됐다가 지표면으로 낙하해 원고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볼 상당한 개연성이 있고, 달리 이 사건 사고와 원고들에게 발생한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사정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배상책임 사건에서 기존 선례에 비해 피해자의 인과관계 증명부담을 완화해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인과관계가 추정된다는 법리를 처음으로 선언한 판결"이라고 이번 판결의 의미를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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