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개방 시도하다 독살당한 소현세자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우리 역사에서 왕세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국가의 운명이 크게 바뀐 사례는 흔치 않았지만 조선시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경우는 다르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인조의 대를 이어 등극했다면 적어도 조선후기의 역사, 특히 일본과의 개화경쟁에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비극은 개인적 삶의 비극과 함께 역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부왕 인조(仁祖)의 군주답지 못한 행동이 왕가의 비극을 국가의 비극으로 연장시켰다. 국제적 감각과 영특한 자질로 제왕이 될 큰 그릇이었던 소현세자는 미쳐 뜻을 펴보지 못한 채 33살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독살당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천주교와 서양문물이 조선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MBC <연인>의 한 장면. |
ⓒ MBC |
볼모가 된 소현세자는 함께 잡혀온 봉림대군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봉림대군이 부왕과 조정의 뜻에 따라 청나라를 적대시하며 증오의 세월을 가슴에 쌓으며 보낸 데 비해 소현세자는 대륙의 정세를 살피면서 이미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소현세자가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길에 오를 때 인조는 서울 교외까지 전송나와 볼모로 잡혀가더라도 소무(蘇武)와 같이 행동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잡혀간 소무는 19년 동안 흉노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지절(志節)을 지킨 인물이었다.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못한 인조는 세자에게 절개를 지킬 것을 분부한 것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수행원 300여 명과 함께 심양에 '심양관'을 차리고 거주하였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세자는 조선 대사 이상의 외교관 역할을 한 셈이다.
소현세자는 1644년 9월에 청군을 따라 연경에 체류하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독일인 천주교신부 아담 샬(Schall, J. A.)과 친교를 맺고 천문·수학·천주교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접하게 되었다. 아담 샬은 청나라 황제의 각별한 은총을 받으며 연경에 천주당을 짓고 소현세자의 숙소와 가까운 동안문에 살면서 소현세자와 사귀었다.
중국 천주교의 대학자이며 연경 남(南)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두 사람이 사귀게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순치원년(順治元年, 1644)에 조선의 왕의 세자 (소현세자)는 연경에 볼모로 잡혀와 있으면서 아담 샬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때때로 천주당에 찾아와서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갔다. 아담 샬도 자주 세자가 거처하는 곳을 찾아와서 오래동안 이야기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이 뜻을 같이하는 바가 있었다. 아담 샬은 연달아 천주교가 바른 길임을 이야기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은 선물로서 그가 지은 천문·산학(算學)·성교정도(聖敎正道) 등의 여러 가지 책과 여지구 한 벌 및 천주상 한 장을 보냈다. 세자는 삼가 이것을 받고 손수 글월을 써 보내어 감사하고 칭찬하는 뜻을 표하였다."
아담 샬은 명말에 <승정역서> 편찬의 중심 인물이고 서양역법에 의해 추산한 신력(新曆) 편수에 종사하고 있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연경에서 만나게 된 것은 조선의 역사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역법과 과학지식 특히 천주교의 교리와 천주상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연경과 선양에서 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간의 여러 가지 갈등 요인을 해결하고 있을 때 친명 존화의식에 빠진 조선의 조야에서는 세자를 탄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전개되었다. 청과 조선 사이를 중재하려는 세자가 마치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주의자로 변신한 것으로 곡해하고 비판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 세력은 세자의 행동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각가지 모략을 일삼고, 인조 또한 몽고 치하의 고려 왕세자들처럼 청나라의 힘으로 자신을 폐하고 세자가 즉위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아들을 감시하기 위해 수시로 내관을 선양관으로 보내 탐지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청국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길에 올랐다. 해외에서 9년 동안을 보낸 후 서울에 도착한 것은 33살 때인 이듬해 2월 18일이었다.
그때는 이미 소현세자의 관측대로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이 그토록 오랑캐로 멸시하던 청국이 중원 대륙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자를 맞은 조정은 대륙의 정세 변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부왕 인조의 세자에 대한 증오심은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세자가 쉽게 볼모에서 풀려나게 된 배경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의한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세자가 일찍 귀국한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 청국의 입장에서 명나라가 망한 마당에 조선은 더 이상 자신들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청국은 조선과의 관계를 풀고자 선심책으로 세자를 돌려보낸 것이다. 세자는 환국할 때 중국인 5명의 환관과 궁녀들을 데리고 왔다. 환관 중에는 아담 샬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교의(敎義)과정을 배우고 있던 천주교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런 일들도 세자의 죽임을 불러온 단초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많은 서양서적을 갖고 귀국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독살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귀국에 앞서 세자는 아담 샬에게서 받은 각종 선물 중 천주상에 대해서는 정중히 돌려보내고 싶다며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저는 서양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가고 싶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천주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단사교(異端邪敎)라고 지목되어 천주의 존엄을 더럽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상을 귀하에게 돌려보내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귀하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을 사례로 보내어도 귀하의 은혜에 비기면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강제언, <서양과 조선>)
인조의 냉대와 서인세력의 질시를 받으며 귀국한 세자는 두 달만에 병석에 누웠다가 곧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세자는 동천(東遷)하여 얼마되지 않아 질병을 얻고 며칠 뒤에 사망했다. 온 몸이 새까맣게 되고 몸 일곱 군데의 구멍에서 선혈이 낭자했다."(<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 6월조)
온 몸이 새카맣게 되고 몸 일곱 군데의 구멍에서 선혈이 낭자한 이 의문의 죽음은 독살임이 분명했다. 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의 관련설이 세간에 떠돌았다.
세자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 이형익은 조소용의 사갓집을 출입하던 의원으로서, 불과 3개월 전에 의관으로 궁중에 들어왔던 인물이며, 세자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례를 무시한 채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사했던 것이다.
인조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손이 적통으로 왕위를 잇는 것이 당시의 법도이고 관례였다. 그런데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 즉 세손이 3명이나 있었는데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적장자이므로 3년상을 치러야 했는데도 1년 단상으로 치르도록 하고, 세자빈을 역모혐의로 사사하고,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그 중 두 명은 의혹속에 죽게 만들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는 유능한 왕세자의 비극을 생각하기 이전에 역사의 불운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아니라도 왕조시대에는 많은 왕과 세자, 왕자, 왕비가 권력쟁탈의 음모와 시기로 '궁중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도 유독 소현세자의 죽음 앞에 역사의 불운을 떠올리게 된 것은 1644년이란 시점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세자가 등극하여 아담 샬을 비롯한 청국에 머무른 서양의 천주교인, 학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것은 그보다 232년 후인 1876년이고, 일본은 조선보다 22년 앞선 1854년이었다. 조선은 일본보다 200년 이상을 앞서 개방의 기회를 갖고서도 권력투쟁의 음모에 빠져서 기회를 놓치고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들을 죽이고도 부족해 며느리를 적으로 삼아 죽인 후 사돈은 물론 손자까지 죽인 비정한 국왕의 시호가 어질 인자를 쓰는 인조(仁祖)인 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인조라기보다는 악조(惡祖) 또는 증조(憎祖)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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