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산엔 경제가치 넘어선 +α가 있다 [이동주의 신해양시대-6]
평화유지에 기여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국익
세계무대로 청룡처럼 날아오를
K-잠수함을 상상해보자
손흥민이 머나먼 유럽 프로축구 무대에서 멋진 골을 넣으면 한국에 있는 나는 왜 이리 뿌듯해질까. 개인적으로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나에게 무슨 이득이 생긴다고 한밤중에 잠 못 들고 도파민 중독증상을 경험하느냐는 얘기다. 그 오지랖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한 인물은 아마도 유발 하라리(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 교수)가 아닐까 싶다. 역사책인지 과학 교양서인지 알쏭달쏭한 저서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현세 인류를 특징짓는 ‘인지혁명’을 소개하며 꽤 신선한 통찰력을 보여줬다.
인지혁명이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을 믿고 그 신념을 공유하는 인간들만의 독특한 사고체계를 말한다. 이를테면 국가, 민족, 종교, 이념 같은 것이다. 소문과 뒷담화를 토대로 구축되기 시작한 이 기묘한 집단적 신념이 파리 한 마리도 잘 못 잡는 인류를 지구상 최상위 포식자 지위에 오르게 만든 동력이란다. 그 집단주의는 종종 광기로 돌변해 무자비한 동종 학살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현대사회는 법률, 화폐, 민주주의처럼 과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촘촘해진 허상의 기반 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다소 비약일지 몰라도 돌멩이밖에 없던 거제도 옥포만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조선소를 짓고 초대형 선박을 만들어내는 오늘날의 광경 역시 그런 신념 체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듯하다. 수많은 근로자를 공동의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모멘텀을 그저 개인 차원의 생존전략만으로 설명하긴 부족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던 요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룡의 해 갑진년. 신해양시대를 이끌어 온 한국의 조선업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새해에도 위기와 기회는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올 것이다. 벽두부터 지구 한편에선 야만스러운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고 다른 한편에선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총아인 인공지능(AI)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종합적인 해양 솔루션을 창출해내는 글로벌 선도산업으로서 또다시 새로운 항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올 한해 경제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는 본격적인 고성장 궤도에 들어선 한국 방위산업의 세계화다.
K-방산은 이미 육군, 공군 무기체계에서 신속한 공급능력과 뛰어난 가성비, 면밀한 사후관리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경쟁력을 입증했고 이제 해양 분야로 확산할 추세다. 잠수함을 비롯한 K-함정의 세계무대 진출이 개별기업을 넘어 국가 차원의 새해 핵심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실 한국의 조선업은 태생부터 통째로 수출산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옥포조선소에서 만들어지는 선박의 90% 이상은 해외 주문을 받아 생산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화오션의 연혁에는 세계 최초, 최고, 최대라는 수식어들이 즐비하다. 첫 이중선체 VLCC(초대형 유조선), 쇄빙LNG(액화천연가스) 1호선, 2만 4000TEU급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건조 등등.
‘특수선’이라 불리는 군용 함정들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분야이기 때문에 국내 조선업계가 손익계산을 떠나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몫이다. 당연히 이 분야에서도 ‘국내 최초’ 같은 접두사는 거의 자동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1996년 첫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 진수부터 2017년 잠수함 첫 수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한화오션의 야심작인 3600톤급 중형잠수함 장보고-III 배치-II 3번함 건조사업 본 계약을 지난해 말 체결하면서 마침내 함정 분야에서도 ‘세계적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 탑재되는 공기불요추진체계(AIP)와 리튬이온배터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 디젤잠수함 분야의 최장 잠항시간과 수직발사관 장착 등이 모두 세계 최초이거나 최강급이다. 무인잠수정을 비롯한 미래잠수함 분야에서도 독보적 입지를 선점해나가고 있다. 국내에서 더 이상 경쟁상대를 찾기 어려운 초격차 방산 리더로서 다음 단계는 세계무대 진출이 될 수밖에 없다.
함정 수출의 최대 장점은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는 점이다. 구축함이나 잠수함은 그 자체로 육해공 전투에 쓰이는 여러 기능이 망라된 복합 무기체계다. 그래서 첨단전투기나 탱크에 비해 보통 10~100배, 때에 따라선 그 이상의 부가가치를 지닌다. 미국 핵 항공모함의 경우 그 하나만으로 전쟁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라는 의미로 ‘전략자산’이라는 별칭을 붙이는데, 그건 해군 전력의 가치가 그 정도로 체급이 다르다는 방증이다.
우리 정부도 방위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27년 세계 4대 수출국 달성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정책적 지원에 나선 것은 국익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한발 더 나아가 올해부터 가시화될 잠수함 수출은 ‘K-방산의 퀀텀점프’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 만한 중대 사안이므로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지원책이 강구되길 기대한다. 아쉽게도 방위산업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금융지원 정책에서는 선거분위기에 젖은 정치권이 태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하루속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한국 방위산업의 가치를 단지 경제적 이득으로만 환산하는 건 근시안적 사고다. 안보 관련 분야에는 늘 금전적으로만 계산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더구나 K-방산의 도약은 어둠 속에서 남몰래 칼을 갈아온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의 개가가 아니라 세계 각국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한국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게 된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전형이다. 그 의미의 차이는 전쟁의 목적이 침략을 위한 것인지,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확연하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단정하긴 어려워도 인간 세상에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신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이 털 없는 원숭이를 다른 야생동물과 구분 짓게 만든 사피엔스 인지혁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방위역량이 평화적 세계질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거기엔 국격 상승을 포함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엄청난 무형의 가치가 더해질 것이다. 손흥민의 멋진 골이 그저 개인 연봉을 올리는 데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게 아니듯이.
K-잠수함이 갑진년 청룡처럼 세계로 날아오르는 한 해를 다 함께 상상해보자.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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