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 할 수 없단 말 하지마라"…91세 '일본판 송해' 롱런 비결
미국에 오프라 윈프리(70)가 있다면 일본엔 구로야나기 테츠코(黒柳徹子)가 있다. 나이나 경력으론 구로야나기가 대선배다. 1933년생인 그는 올해 91세로, 1976년부터 TV아사히 토크쇼 '테츠코의 방(徹子の部屋)'를 진행해왔다. 지난해엔 "동일 토크쇼 최장수 진행자"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뉴욕타임스(NYT)가 21일(현지시간) 집중 조명했다. NYT의 기사 제목은 "나이는 토크쇼 스타덤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한 여성"이다. 2022년 95세로 별세 직전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송해 선생이 떠오른다. 예일대 아론 지로우 동아시아 문학 담당 교수는 "구로야나기는 일본 방송사 그 자체인 인물"이라고 NYT에 말했다.
토크쇼 진행자로서는 낯설더라도, 한국에도 구로야나기의 인지도는 높다. 『창가의 토토』라는 소설의 작가로서다. 대안학교에 다닌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토 짱'이라는 3인칭 시점에서 서술한 자전소설이다. 일본에서 1981년 발간된 이 책은 2024년 1월 현재 35개국에서 번역됐고, 2500만부 팔렸다. 지난해 10월 속편이 나왔다.
NYT는 구로야나기의 나이를 언급하며, "90대인 그는 100세까지 '테츠코의 방'을 진행하는 게 꿈이라고 농담하곤 한다"고 전했다. NYT는 "농담"이라고 표현했지만, 구로야나기는 진심을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TV아사히 방송 제작자는 "프로그램 녹화가 격주 목요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인데, 구로야나기 씨는 끝까지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방송 진행을 위한 연구와 체력 관리에 힘쓰고 있다는 뜻이다.
76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구로야나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던 인물의 면면은 화려하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토로했고, 세상에 비밀로 해왔던 이혼을 고백했고, 국가 경영의 어려움을 소개하기도 했다. 고(故)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연방 서기장부터 미국 팝스타 레이디 가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고(故) 필립 공도 구로야나기의 앞에 앉았다. 가수이자 배우인 일본의 톱스타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는 "'테츠코의 방'에 출연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엔 한국 배우 안효섭(28)도 출연했다. TV아사히 공식 유튜브 방송에 따르면 구로야나기는 그를 "한국의 멋진 분을 모셨다"고 소개했고, 반려묘 등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토크쇼 롱런의 비결은 뭘까. 그는 NYT에 "내가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은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청자들이 그가 이상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컨트롤 하는 것"이라며 "시청자들이 '이 사람, 몰랐는데 꽤 괜찮은걸'이라고 생각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구로야나기를 정의하는 건 장수 방송인 그 이상이다. 그가 방송에 데뷔한 1970년대 초반엔 여성이 방송을 진행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NYT는 "구로야나기는 방송계 여성의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라며 "방송 관계자들이 그에게 (출연 기회를 전제로) 데이트 신청을 하곤 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부적절한 발언도 농담으로 포장해 자주 했다"고 전했다. 구로야나기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72년 한 방송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이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했다"며 웃었지만 "오늘날의 일본은 그 당시에서 많이 변했다"고 덧붙였다.
일하는 후배 여성들에게 그가 전하는 조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여성은 특히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것, 이왕이면 결혼하지 말고 싱글로 살 것. 그는 NYT에 "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특별한 직업을 선택했다면 싱글로 사는 것이 더 낫고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륜과 경륜이 행간에 읽히는 대목이다. 구로야나기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아이도 없다.
그런 그가 지난해 『창가의 토토』속편을 내기로 결심한 동기는 뭘까. 전쟁이었다고 한다. 그는 NYT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속편을 결심했다"며 "나도 어린 시절 전쟁을 겪었고, 많은 이들에게 아이가 전쟁을 경험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48년간 토크쇼를 진행하며 만난 수많은 게스트 중 구로야나기가 애착을 갖고 추억하는 인물은 누굴까. 고르바초프다. 그는 NYT에 "고르바초프에게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미하일 레르몬토프라고 답하며 시를 바로 읊더라"며 "일본 정치인 중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낭송할 수 있는 인물이 있기는 할까"라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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