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km 달려와 영하 20도 차박…트럼프 맹신한 '성난 사람들' [美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가다]
연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생업도 제쳐놓은 채 트럼프의 모든 일정에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트럼프의 '정치 사생팬'이다. 미국에서 트럼피(Trumpy)로 부르는 이들을 미 공화당 경선 유세가 한창인 뉴햄프셔 일대에서 21·22일(현지시간) 이틀에 걸쳐 동행 취재했다.
영하 20도 노숙…“6일 전부터 기다려”
21일(현지시간) 이른 오전. 뉴햄프셔 로체스터 시청에서 만나기로 했던 ‘프론트 로 조(Front row Joe’s)의 공동 대표 마이크 포트먼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그를 만난 곳은 길가에 주차된 작은 승용차였다. 오후 7시로 예정된 트럼프의 유세 때 맨 앞자리에 앉기 위해 영하 20도 날씨에도 ‘차박’을 했다.
눈을 부비고 일어난 포트먼은 ‘춥지 않느냐’는 말에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2020년 오클라호마, 앨라배마 유세 때는 6일 전부터 노숙하며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인디애나주다. 로체스터까지 약 2000㎞, 쉬지 않고 달려도 18시간 거리다. 폭설 때문에 운전해 오는 데만 3일이 걸렸다고 했다.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프론트 로 조’는 ‘맨 앞줄에 앉는 사람들’을 뜻한다.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밤새 기다려 트럼프 유세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포트먼은 “2016년 아이오와 코커스 때 맨 먼저 줄을 섰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임이 지금의 프론트 로 조”라며 “50여명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고 말했다. 유명세에 비해 회원이 적은 것같다고 묻자 “들어오고 싶다는 사람은 많지만 혹시 트럼프를 싫어하는 시위대가 들어올 수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트럼프 “맨 앞줄의 조…판타스틱!”
포트먼 대표와 그의 멤버들은 이날 유세에도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가 그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유세를 막 시작한 트럼프는 포트먼을 알아 보고는 “조?”라고 반긴 뒤 직접 이들을 소개했다. 트럼프는 “조들은 사방에서 따라다녀서 절대 떼어낼 수가 없다”며 “정말 유명 인사들이 됐고, 정말 대단하다(fantastic).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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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현실의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트럼프의 맹목적 추종자는 ‘조’가 전부가 아니다. 1주일 전 뉴저지에서 560㎞, 12시간을 운전해 왔다는 에드워드 X 영(64)은 자신을 배우 겸 감독, 특수분장사라고 소개했다. 그의 옷에는 트럼프의 전국 유세 때마다 구한 기념 배지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영은 “코로나19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달려왔다”며 “1주일 내내 차에서 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숙을 하니 군인이 된 것 같지만, 사실 이 나라는 말과 생각의 전쟁 또는 내란을 치르고 있다”며 “100년 전에는 나치가 악(惡)이었다면 지금 나라를 파괴하는 사악한 괴물이 바로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뿐 아니라 유사한 성격의 모임들을 모두 잘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공산주의자가 운영하는 언론과 사악한 괴물 민주당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하려면 나같은 고독한 유격대원 같은 역할도 필요하다”며 “트럼프는 록스타 수퍼히어로 대통령이자 현실의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대통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화 도중 동행한 5살 딸에게 트럼프의 훌륭한 점을 설명하던 크리스 하딩(58)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딩은 “사람들이 트럼프가 미쳤다고 하는 것을 안다”며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국경이 뚫린 미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오만하고 미친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인 출신인 하딩은 기자에게 한국에서 복무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미국이 도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하딩은 “돕기는 해야 한다”면서도 “그래도 미국에 있는 노숙자를 먼저 도와야 한다”고 답했다.
생업 포기…7년간 트럭 타고 “교육사업”
뉴햄프셔 시청 바로 앞에는 트럼프의 홍보물로 도배된 이동식 트레일러가 서 있었다. 트레일러 안에서 그의 아내와 대충 만든 끼니를 때우던 록키 그래나다(64)를 만났다.
그는 7년전에 생업을 접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트럼프를 홍보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그래나다는 “이 트럭이 내 집이고, 트럭을 타고 전국 42개주를 다녔다”며 “언론이 트럼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량에 붙이는 트럼프 홍보물을 나눠주며 “트럼프는 바이든에게 (대통령직을)강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트럼프가 반드시 이기겠지만, 저들이 또다시 강탈할 가능성이 있다”며 “과거 힐러리는 유세에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일당 50달러를 지급하는 것을 직접 봤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트럭에서 파는 트럼프 관련 '굿즈’은 대부분 기증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대화를 마칠 무렵 “나도 과거 민주당을 지지하며 트럼프에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며 “그런데 진실을 알고 ‘내가 잘못된 편에 서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내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상처받은 ‘프레카리아트’의 분노
기자가 만난 트럼피들에겐 공통점이 발견됐다. 과거 평범한 백인 중산층 또는 서민이었다가 현실에서 상처와 실패를 겪고 생활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이다.
영은 “13년전 암으로 배우자를 잃은 뒤 병원비 등을 부담하며 경제적 파산을 경험했다”고 했다. 하딩은 “군을 제대한 뒤 33년간 트럭을 운전하며 근근히 살고 있다”며 “민주당의 생각처럼 내가 77세까지 살기 위해 일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7년간 남편과 함께 트럭을 타고 트럼프를 따라다닌 그래나다의 배우자는 깊은 한숨을 쉬며 “나는 할 말이 없으니 남편과 얘기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중앙일보가 빅데이터 컨설팅 업체 아르스프락시아와 함께 지난 1년간 트럼프의 발언을 전수조사한 결과 트럼프는 ‘성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를 집중 공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레카리아트는 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통상 전통적 백인 중산층 문화의 붕괴에 불안감을 느끼는 계층을 지칭한다.
트럼프는 이들의 분노와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민주당과 중국을 적(敵)으로 규정했고, 연일 국경문제와 석유 개발 중단으로 미국인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삶이 피폐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로체스터 유세에서도 이 말을 반복했고, 지지자들은 연신 ‘미국(USA)’을 연호하며 화답했다.
로체스터=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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