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첫 단추는 신년 기자회견이다
서로 다른 사안이라는 게 민심
측근 말고 윤 대통령 직접 나서
‘무례한’ 질문에 진솔히 답해야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줘서는
국민들의 생각 읽을 수 없다
신문사에서 30년을 일하는 동안 기자가 품위와 격조를 우선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였다. 기자(記者)에는 스승 사(師)의 의사·교사, 선비 사(士)의 변호사·세무사와 달리 놈 자(者)가 들어간다. 쓰는 놈이라는 뜻이다. 존경할 필요가 없는 직업이라는 의미도 담겼을 것이다. 오래전 사이비에 가까운 못된 기자에게 약점이 잡혀 곤욕을 치른 친구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기자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일을 악착같이 찾아내 온 세상에 알리고, 쏟아지는 험담에 화가 난 사람을 굳이 찾아가 “누구누구가 이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직업이라는 취지였다. “너희는 왜 그렇게 사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 역할이 필요하다는 신념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사람들 수십명을 모아놓고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마련한 자리가 기자회견이다. 분위기가 좋을 리 없다. 정성껏 자리를 만들었는데 잘못만 캐니 안 하니만 못하기 일쑤다. 상원의원 36년에 외교적 언어의 달인이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조차 기자회견 중 질문을 한 기자에게 “멍청한 개XX(What a stupid son of a bitch)”라고 했을 정도다. 백악관은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바이든을 응원한 사람도 꽤 있었을 것이다. 국민을 대신해 물어보는 게 기자의 의무라지만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든 독한 말이기 때문이다. 유럽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인 오노레 드 발자크는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라는 책에서 기자에게 이런 독설까지 쏟아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모든 일에 관여하고, 생각이 편협해진 보잘 것 없는 사람.”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정면충돌에 여의도가 흔들린다. 여권에서는 공멸로 가는 길이라는 걱정이 쏟아졌고 야당은 약속 대련 중 대통령의 정치 개입이라는 불법이 드러났다고 공세를 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배의 변심 때문인지, 21년 동지들의 치밀한 계산인지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옳다구나 탄핵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감흥은 없다. 총선에서 상대를 공격할 소재는 되겠지만 습관적 반복에 또 대선불복이냐는 거부감이 앞선다. 정말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윤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더 멀어진 것이다. 좀처럼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어 한 위원장이 ‘국민들의 눈높이’를 말하자마자 바로 내친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강성희 진보당 의원에 대한 과잉경호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국회의원조차 잘못 접근하면 경호원들이 입을 막고 들어낸다는 건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독재자 프레임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도 그렇다. 누가 봐도 고약하다. 기사는 원래 그렇게 쓴다고? 절대 아니다. 선친과의 친분을 앞세워 함정을 파고 1년을 쥐고 있던 영상을 특검법 통과 직전에 터뜨려 선거에 영향을 주는 건 취재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떤 신문사도, 어떤 데스크도 기자가 플레이어로 나서 없는 일을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잘못이 있다고 해서 명품백 수수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둘을 전혀 다른 사안으로 받아들이는 게 민심이다. 함정, 공작이라는 말 대신 해명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도 익명으로 처리되는 대통령실 누군가의 백브리핑이나 측근들의 SNS를 통해서가 아니라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설명해야 한다. 첫 단추는 신년 기자회견을 열어 기자들의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생각이 편협한’ 사람들이 ‘무례한’ 질문을 쏟아내겠지만, 그게 국민들이 묻고 싶은 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 집권 후반에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하면 정치가 꼬인다는 말이 유행했다.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추구하면 국민 생각을 읽지 못하는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의 우스개다. 당시 청와대는 기자회견을 거부하고 국민과의 대화라는 그럴듯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만 주력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는 대통령에게 실망한 많은 사람이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윤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이를 비판하며 ‘국민 속으로’라고 외쳤다. 하지만 지금 윤 대통령은 전임자의 전철을 밟고 있다. 도어스테핑과 대통령실 이전을 밀어붙이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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