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성 목사의 하루 묵상] 소돔인의 자선

2024. 1. 24. 03: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유대인에게 전해오는 '소돔인의 자선'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소돔인들은 가난한 나그네가 흘러들어와 적선을 구하면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금 조각을 주곤 했다. 금 조각을 받은 사람은 엄청난 자선 앞에서 감격해 사례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절망했다. 소돔성에는 나그네에게 음식을 팔 수 없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손에 금 조각을 쥔 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죽고 나면 금 조각을 줬던 사람이 와서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금 조각을 되찾아 가곤 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전해오는 ‘소돔인의 자선’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소돔인들은 가난한 나그네가 흘러들어와 적선을 구하면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금 조각을 주곤 했다. 금 조각을 받은 사람은 엄청난 자선 앞에서 감격해 사례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절망했다. 소돔성에는 나그네에게 음식을 팔 수 없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손에 금 조각을 쥔 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죽고 나면 금 조각을 줬던 사람이 와서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금 조각을 되찾아 가곤 했다.”

소돔인들은 자선을 베푼 듯하지만 실제로는 베풀지 않았습니다. 금 조각을 주면서도 음식은 팔지 않는 것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교활하고 잔인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우화를 주고받으며 웃었던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이 만든 편법을 통해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로 부모님 공경의 법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가장 율법적이면서도 가장 무법한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도의 관계는 여러 번 변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지만 바울이 떠난 후에는 바울을 비방했고 그들의 신앙은 바른 노선에서 이탈했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참 신앙의 삶은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역설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천국 백성의 증거는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사는 능력입니다. 구제하겠다는 말보다는 실질적인 구제가 중요합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결심보다는 구체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삶이 중요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우리 문제는 말을 앞세우는 데 있습니다. 아니 말만 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회가 말만 무성하고 말씀의 삶은 없는 곳이 될까 두렵습니다.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의 방문을 받은 회당 사람들은 내심 설교를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명성을 생각해서 설교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설교 후 회당을 담당한 랍비가 찾아 왔습니다. 설교한 랍비가 물었습니다. “그래 오늘 설교가 괜찮든가?” 회당을 맡은 랍비가 “놀라운 설교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덧붙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설교함으로써 주는 유익보다 설교하지 않음으로 주는 유익이 더 크다는 것은 생각해 보시지 않았는지요?”

사람들은 누가 듣고 싶지 않은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으면 “나한테 설교하지 마!”라고 반발합니다. ‘듣기 싫으니 말하지 마’라고 하지 않고 거기 왜 설교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일까요. 설교가 교회에서 이뤄지는 것을 다 아는데 말입니다. 은연중 설교에 대한 거부감이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거부감의 정체는 삶이 따르지 않는 설교에 대한 게 아닐까요. 저 역시 설교하는 목사로서 매우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능력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김운성 영락교회 목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