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인본주의 시대에서 물본주의 시대로
새해가 밝았다. 이제 인류는 본격적으로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인류 문명사가 사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문명사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는 순간이다.
천 년 이상의 중세 암흑기에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시대를 살았다.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삶이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가 서기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화하면서 중세 유럽은 신이 중심이 된 사회로 바뀌었다. 하나님을 위해 대규모 성당을 건축하고 교황의 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능가하곤 했다. 신이 모든 삶의 중심인 신본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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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사회로 인류문명 대전환
사물이 인간을 규율하는 시대로
인본주의 쇠퇴와 인공지능 확산
인간 주체성과 존엄성은 지켜야
」
이런 신본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교개혁, 르네상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로 바뀌었다. 삶의 중심이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왔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을 갖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의 논리도 제공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과학지식이 발전하고 20세기 들어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풍요로운 대량소비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는 인간 탐욕을 부추겨 지구 생태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석연료 남용으로 기후위기가 나타나고 넘쳐나는 쓰레기로 환경이 파괴되었다. 매년 약 600억 마리의 닭, 26억 마리의 오리, 15억 마리의 돼지, 5억 마리의 양, 4억 마리의 소가 식량으로 도축된다.
이제 다른 동물이나 물체를 객체로 지배하던 인간 중심의 삶에 변화가 일고 있다. 애완견(愛玩犬)이 반려견(伴侶犬)의 지위에 올라섰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지난해 반려견의 유모차인 소위 개모차가 어린아이 유모차 구매량을 57% 대 43%로 추월했다고 한다. 동물보호 차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가 늘어나고 동물학대는 아동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범죄행위로 여겨진다.
언어 표현에서도 객체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이들을 주체로 대접하여 능동태 서술어를 활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신문이나 TV의 편집 지침에서도 모든 객체의 “된다”라는 표현을 “한다”로 바꾸게 한다. 자연현상인 “폭풍이 확산된다”를 “폭풍이 확산한다”로, “문제가 악화되면”을 “문제가 악화하면”으로, “금리인하가 지속된다”를 “금리인하가 지속한다”로 바꿔 쓰도록 한다. 객체도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알게 모르게 인간중심 인본주의를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3년은 인류가 인공지능(AI)으로 새로운 문명사를 써내려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 3.5 출현 5개월 만에 GPT 4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을 인류는 깨닫기 시작했다. 올해 CES나 다보스 포럼에서도 인공지능이 모든 주제를 석권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이 주체적인 삶보다 사물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도 우리의 이전 행위를 분석한 자료에 의해 추천되고 유도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도 가짜뉴스로 유포되는 정보를 그럴듯하다고 판단한다. 유튜브나 SNS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내용만 반복적으로 보고 듣다 보면 인간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상실된 채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게 된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나 우리나라 총선에서도 이런 현상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 본연의 주체적 삶은 점점 상실될 것이다. 마치 객관적 진실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뉴스,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 상업주의 광고 등과 같은 객체들에 의해 주체인 인류의 삶이 지배되는 물본주의(物本主義)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정치체제인 군주제가 인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투표선거제에 의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면, 빠른 미래에 물체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주체적 판단보다 객체인 인공지능의 판단이 더 뛰어나고 효율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객관적 현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본주의 현상이 가속화될 것 같아 씁쓰름한 한 해의 시작이다. 하지만 인본주의 시대에도 신을 믿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물본주의 시대가 되어도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유지되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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