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넥타이 매고 집단체조하던 소녀…북한판 안네의 일기”
고교생 은경이는 고민이 많다. 추운 날씨에 바지 대신 교복 치마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야 하는 게 귀찮고, ‘칼 군무’를 해야 하는 집단체조 연습도 하기 싫고, 영화나 드라마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건 슬프다. 여느 고교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은경이는 사실 북한이탈주민이다. 지난 22일 발간된 『은경이 일기』(북한연구소)의 주인공이다.
은경이가 매기 귀찮았던 빨간 넥타이는 북한 소년단의 상징이며, 집단체조는 체제 선전용 매스 게임이고, 그가 보고 싶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와 드라마는 남측의 것이었다. ‘장군의 아들’ 영화를 몰래 봤다가 “세상에 (북한 김정일) 장군 외엔 장군이 없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곳에서 은경이는 탈출해 남으로 왔다.
이제 30대 초반에 아이 두 명의 어머니인 그에겐 소원이 하나 있다. “내 아이들이 내가 북에서 왔다는 걸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는 것. 은경이와 함께 책을 펴낸 김영수 북한연구소장이 지난 19일 인터뷰에 대신 나온 까닭이다.
은경이는 김 소장이 서강대에서 북한학을 가르치던 시절, 학생이었다. 책은 은경이가 직접 쓴 부분도 있지만 구술하고 김 소장이 글로 엮은 부분도 많다. 은경이는 본인이 택한 가명이다. 김 소장은 이 책을 “북한판 ‘안네의 일기’”라고 표현하며 “수용소 이야기 대신 주민들의 생생한 일상 이야기만으로도 북한 인권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은 은경이가 학교와 집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시계열 순으로 펼쳐낸다. 중간중간 삽화도 곁들였다. ‘사로청 지도원’(사회주의 애국청년동맹 지도원)이나 ‘맵짜다’(멋지고 세련됐다) 등의 북한식 용어엔 따로 설명을 붙였다.
김 소장은 “감옥이나 수용소 얘기 대신 은경이가 농활 가고, 추석 명절 쇠는 그야말로 생활감 가득한 이야기들”이라며 “그런데도 읽고 나면 마음에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은경이 후속으로 남학생의 이야기도 구상 중이고, 무엇보다 북한 장애인 인권을 위한 책을 내고 싶다”며 “지난해부터 탈북 장애인 돌봄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면담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민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들이 가진 트라우마를 달래줄 방안이 필요하다”며 “정신과 치료 바우처를 발급하는 것 등도 방법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 소장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이탈주민의 인권 보호를 강조한 점을 언급하며 “3만 탈북민의 대다수인 여성의 인권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며 “이들의 심리 건강을 도울 수 있는 여성 활동가들을 육성하는 것도 인권 사각지대를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라 조언했다.
책 출간은 또 다른 시작이다. 북한연구소는 현재 영어 및 일본어판과 웹툰 출간을 준비 중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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