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선으로 빛을 엮다
선악과를 따서 손에 쥔 이브(하와)와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아담의 표정은 득의만만하기는커녕 겁먹은 듯 불안이 감돈다. 곧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말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이 그린 에칭 판화 ‘아담과 하와’(1638)는 인간 심리를 예리한 바늘로 드로잉하듯 정확히 표현해냈다. 이 그림 속 두 사람은 알브레히트 뒤러가 신화 속 인물처럼 미끈하게 표현한 것과 달리 몸매가 펑퍼짐한 게 너무도 평범한 사람처럼 묘사돼 있어 오히려 더 감동을 준다.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가 한국에 왔다. 대구미술관에서 하는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전을 통해서다. 렘브란트는 불멸의 걸작으로 불리는 ‘야경’에서 보듯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가 돋보이는 유화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판화로 한국 관람객을 만난다. 렘브란트는 유화 뿐 아니라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활용한 동판화를 평생 300여점 남기며 판화 역사에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 받는 독보적인 판화가다. 이 전시는 네덜란드 렘브란트순회재단과 벨기에 판화전문미술관 뮤지엄드리드가 공동 기획했다. 판화가로서 렘브란트의 면모를 마주할 수 있도록 두 기관 소장품 120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이다.
유화에 가려졌지만 렘브란트는 판화로 동시대 인기를 누렸다. 17세기는 판화의 시대였다. 서양미술사학자 노성두씨는 2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1600년대 초반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담 광장은 판화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다. 잘 나가는 판화 점포들이 줄지어 입점해 있었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나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 같은 잘 알려진 회화사의 걸작을 모본 삼아 작품의 전체 또는 부분을 베낀 판화가 다량으로 유통되던 시대였다.
렘브란트는 비교적 늦게 판화에 입문했는데, 뷰린으로 깎아서 파내는 다른 동판화 화가들과 달리 펜으로 그림을 그리듯 가볍고 빠른 손놀림이 가능한 에칭에 주력해 인기를 끌었다. 렘브란트의 동판화 밑천은 풍부한 상상력이었다. 노씨는 “렘브란트는 한 작품을 인쇄소에서 다량으로 찍어내는 다른 판화 작가와 달리 집안에 개인적으로 프레스기를 들여다 놓고 한 장 한 장 작품 하듯이 첨삭을 해가며 찍어냈다”고 강조했다.
렘브란트의 상상력과 독창성은 위에서 언급한 작품 ‘아담과 하와’에서도 볼 수 있다. 선악과를 딴 두 사람의 상투적이지 않는 표정도 그렇지만, 나무에 매달린 뱀은 상상력이 가동돼 마치 용처럼 보인다. 또 두 사람의 뒤편에는 당시 무역 대국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반영한 듯 인도에서 왔다는 진기한 동물 코끼리도 묘사돼 있다.
렘브란트는 1606년 암스테르담 서쪽 레이던에서 제분소 집안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혁교회 교도, 어머니는 카톨릭 교도였다. 부모는 어려서 그림에 재주를 보인 그에게 그림 공부를 시켰고 1631년 말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초상화 전문화가로 활동했다. 인기가 많아 고관대작의 끊이지 않는 초상화 주문을 받으며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는 미술상인 헨드릭의 집에 머물다 1634년 헨드릭의 사촌인 사스키아와 결혼한다. 그렇게 명성과 부에 이어 행복까지 거머쥔 당대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의 명성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예술가로서의 강한 내적 욕구와 고집 때문이었다. 초상화를 주문한 고객은 자신을 멋지게 묘사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초상화 모델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기에 고객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했다.
점점 초상화 주문은 끊겼고 작품에 대한 인기는 식어갔다. 결정타를 남긴 것은 1642년에 그린 민경경비대의 단체 초상화인 ‘야경’이었다.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는 역사의 새 장을 연 걸작으로 불린다. 하지만 당시 이 집단 초상화를 주문한 의뢰인들은 같은 돈을 지불했는데도 등장인물들의 크기가 제각각인 그림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나쁜 평판이 돌면서 초상화 화가로서의 인기와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세 되는 해 동시에 일어난 불운이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화가 인생은 ‘야경’ 제작과 아내 사망이 겹쳐진 164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설명이 된다. 렘브란트는 마흔살 즈음에 아내를 닮은 19살짜리 보모와 다시 결혼하려고 했지만 추문만 남긴 채 결혼에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비상업적인 그림에 점점 매달리면서 가산을 탕진한 끝에 죽기 13년 전인 1656년에는 결국 파산, 경매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잃는 처지에 놓인다.
이번 전시에는 렘브란트의 대표장르인 자화상과 성서화가 풍부하게 나와 생애를 짐작하게 한다. 렘브란트는 유화에서도 그랬지만 동판화에서도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모자를 쓰고 웃는 자화상’ ‘사스키아와 있는 자화상’ 등 30대까지 그려진 동판화 초상화에는 행복감과 환희가 넘쳐난다.
성서화는 렘브란트를 설명하는 또 다른 회화 장르다. 신앙이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렘브란트는 평생 800여점이 넘는 성서화를 남겼는데 판화로도 제작된 성서화를 이번 전시에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희생’ ‘병자를 고치는 예수’ ‘이집트로의 피신’ ‘선한 사마리아인’ 등 신구약의 주요한 장면 등장인물을 렘브란트가 어떻게 구성하며 극적인 장면으로 시각화했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 ‘십자가를 내림’은 같은 제목의 유명한 유화와 구도가 거의 같아 유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준다.
풍속화도 예기치 않게 만나는 장르다. 마치 17세기 네덜란드의 김홍도를 보는 기분을 준다. 렘브란트는 특히 ‘눈먼 바이올린 연주자’ ‘떠돌이 농부가족’ ‘나무 의족을 한 거지’ 등 밑바닥 층 사람들을 동판화에 담아 그의 가치관을 짐작하게 한다. 또 ‘팬케이크 굽는 여자’ 등 그 시대 가장 일상적인 풍경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정희 학예사는 “사진이 발명되기 200년 전, 마치 카메라 렌즈와도 같은 시선으로 17세기 당시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작품에 담아낸 렘브란트의 시선에 주목했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17세기의 사진가로 명명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된 작품은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다. 어떤 것은 증명사진처럼 작다. 사이즈가 커봤자 A4 크기 정도이다. 이 작은 크기에 자유자재로 바늘을 휘둘러 세상 풍경을 담아낸 렘브란트의 정교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그 정교함을 실감할 수 있게 스크린을 활용해 확대한 전시 기법이 돋보인다. 3월 17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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