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앰프'라도 되고 싶었던 사람의 5년

김홍규 2024. 1. 2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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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이 쓴 <사람을 목격한 사람> 을 읽고

[김홍규 기자]

"세상의 중요한 소리는 작게 들린다. 세상의 소음이 그것을 가리기 때문이다. … 언젠가 장애인 농성장에서 보았던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작은 앰프, 작은 목소리를 크게 키우기 위해 분투해온 그 사물이 참으로 장해 보였다. 지난 5년간 나는 그 앰프가 되고 싶었다. 내가 투쟁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를 키워서 더 멀리 보내고 싶었다." (책, 8쪽)
 
고병권은 <경향신문> 칼럼 집필 의뢰를 수락한 이유에 대해 '싸구려 앰프'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지난 5년 동안 <경향신문>에 썼던 칼럼에 더해 투쟁 현장에서 했던 발언을 다듬은 책이다.
 
▲ 책 <사람을 목격한 사람> 표지 고병권이 쓴 책 <사람을 목격한 사람>(2023, 사계절) 표지이다.
ⓒ 사계절
 
최근 몇 달 새로 나온 책 표지에 인물 사진이 유독 많이 들어 있다. 앰프 없이도 말만 하면 목소리를 전달할 커다란 스피커를 가진 이들이 쓴 책이다. 금빛 찬란한 '국회' 배지를 달기 위해 마음이 바쁜 사람들이다. 평소 주인 노릇을 하던 이들이 허리를 굽히는 때가 다가온다. 역설적이지만 그들 때문에 작은 목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싸구려 앰프'가 더 많이 절실한 시기다.

못나고, 어설프지만, 책을 읽은 마음을 적어 두는 이유다. 한 명이라도 '사람'과 사건에 관한 목격담을 듣기를 바란다. 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앰프도 아니고 끊김과 이어짐을 반복하며 겨우 소리를 희미하게 전하는 '싸구려 스피커'다. 그런데도 책에 기록된 '사람을 목격한 사람'들 이야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닿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허술하고 고장난 스피커가 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꾸역꾸역 읽었다. 한 달 넘게, 곁에 두고. <경향신문>에 실렸던 많은 글이 낯설지 않았다. 그 익숙함이 버거웠다. 글자에서 멀어지면 글쓴이가 묘사한 세상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 악몽에서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쓰듯, 재빨리 읽던 책을 덮었다.

어쩌다 책에 눈길이 닿으면, 표지에 그려진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외면하다, 어둡고 낯선 길을 가듯 조심스럽게 손을 더듬어 읽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첫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하고, 세 번째, 네 번째 자리에도 사람이 가득한데 두 번째 자리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슬퍼했다거나 분노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듣고 시뻘게진 눈알을 본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면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다. 그걸 알기에 나는 세 번째에 서고, 겁이 날 때는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도망친다." (책, 27~28쪽)
 
고병권은 윗글이 실린 칼럼에서 <그냥, 사람>을 쓴 홍은전을 두 번째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사람이라면서.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소리와 몸짓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 '알아가면서 앓아가는 사람'"이라고 했다(책, 30쪽). 나는 몇 번째 사람일까? 백 번째, 천 번째, 어쩌면 아예 사건 자체를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

<사람을 목격한 사람> 글쓴이는 자신을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라고 책 맨 앞에 적었다. 책을 쓴 많은 이들은 학벌과 학력을 앞세워 자신을 드러내기 바쁘다. 글쓴이 소개 첫 자리 배치도 예사롭지 않다. 사회가 조직적으로 외면한 목소리를 전하는 앰프 역할을 하겠다며 글을 쓰는 그도 두 번째 사람일 것이다.

"손을 내밀 때 소매를 잡힌" 두 번째 사람은 사건을 직접 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전달된다. 상처와 아픔을 예상할 수 있기에 꺼리게 된다. 모른 척한다. 나도 그렇다. 책은 참사 현장을 최소한 읽기는 해야 한다고 나를 끌어당겼다.

두 번째 사람, 아프고 미안한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 포획된 사람, 함께 남은 사람, 싸우는 사람, 연대하는 사람. 책은 이렇게 7부에 걸쳐 '사람'을 전한다. 에필로그 제목은 '사람 살려!'다.

"시대를 법정에 세우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이 우리 시대의 원칙의 불법적 적용이 아니라 합법적 적용에서 생겨난 사람들, 그 억울함을 우리 시대 법정에서는 풀 수 없고 오직 우리 시대를 법정에 세움으로써만 풀 수 있는 사람들 …" (<고병권의 자본 강의>, 천년의 상상, 14쪽)
 
멧돼지처럼 포획당하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 '외국인 보호소'라는 공간에 강제 구금된 난민, '선량한 시민들'과 함께 지하철을 함께 타려다 욕을 바가지로 먹은 장애인,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중증 발달장애인, 대충 시늉만 하려고 사회가 벌인 중증 장애인 일자리 지원 사업을 맡아 동료들을 돕다 "민폐만 끼쳤다"라는 문자를 보내고 세상을 등진 20대 젊은이, "자신을 말하지 못하는 동료" 곁에서 함께 말하는 입이 되기 위해 시설에 남은 탈시설 활동가, 약과 감금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앞에서 '투명 망토'를 뒤집어쓰는 정신장애인, 철로 만든 방에 갇힌 사람…
이들이 책 속에 있다. 사회가 잘못 그은 선 때문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그들. 다른 사람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견뎌야 하는 이들. "함께 살 자격을 부인당한 사람들"이다. 고병권은 자신이 목격한 사람들의 그 안간힘을 증폭시킨다. "사람이 있다!"
 
"한 사회는 의외로 소리 없이 크게 실패할 때가 있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혹은 다른 소란 때문에 중요한 실패가 지각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실패를 더욱 큰 실패로 만든다."
(책, 86쪽)
 
드러나지 않으면, 아니 드러나지 못하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 다 타는 지하철에 몸을 싣겠다고 목소리를 낸 몇 날은 유심히 본다. 하지만, 욕먹을 각오를 한 지나간 20년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평범', '선량'이라는 말 속에 숨어서 배경과 맥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렌트가 적어 둔 아이히만은 알아도 내가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한 짓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책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지' 차이 나는 장면을 반복한다. '왜?'라고 물어보고 생각하는 이들이 조금 더 많았다면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올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장면이 머릿속에 머물렀다. 아주 오래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박찬욱 감독이 했던 말이다. 정확한 단어들은 잊었다. 대강 내용만 기억난다. 재벌을 만나면 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에 놀란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감되는 말이다.

부드럽게 필요한 것을 에둘러 말해도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때도 많을 것이다. 뭐하러 굳이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을 벌이겠는가. 뉴스 기사에 나온 그들을 욕하는 이는 많아도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우리가 살 곳은 어디인가요?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은 언제인가요?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책, 312~313쪽)
 
책을 쓴 이가 장애인 지하철 행동 400일째 되는 날 했던 연대 발언 가운데 일부다.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방해가 되지 않으면, '과격하지' 않다면, 시간을 빼앗지 않는다면, …. 내가 누리는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자꾸 '조건'을 단다. 그런데 '조건부 시민', '제한적 시민권'은 없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여기를 함께하지 못할 존재는 없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함께 시대를 법정에 세우자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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