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90도 인사'하자, 尹 '어깨 툭' 쳐…"민생 얘기만 주고 받았다"

현일훈, 박태인, 전민구, 왕준열, 황수빈 2024. 1. 23. 18:5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냉동고 한파가 불어닥친 23일 오후 1시40분. 전날 대형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 특화시장 일대도 영하 6.3도, 체감온도 11.1도로 예외가 아니었다.

눈바람이 거세 서 있기도 힘든 날씨 속에 녹색 민방위 점퍼 차림을 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에서 내린 윤석열 대통령이 기다리던 한 위원장을 알아보고 다가갔다. 한 위원장이 허리를 90도로 숙인 뒤 인사하며 웃자,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명품백·사천(私薦) 논란’으로 충돌하던 두 사람은 이날 이렇게 만났다.

남색 패딩 점퍼를 입은 윤 대통령은 유의동 정책위의장, 피해 지역이 지역구인 장동혁 사무총장, 충남이 지역구인 정진석·홍문표 의원 등과도 인사를 나눴다. 현장에는 150여 명의 피해 상인들도 있었다.

윤 대통령이 화재 현황을 보고받으려 걸어가자 한 위원장은 두 손을 모은 채 뒤따랐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을 비롯한 당·정 관계자들은 소방 당국으로부터 화재 발생 원인과 피해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11시 8분 서천특화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점포 227개가 불에 탔으며 두시간여 만에 큰 불길을 잡았다. 보고를 듣던 윤 대통령은 몇 가지 질문도 했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 한 발자국 뒤에서 같이 보고를 들었다. 윤 대통령이 화재 현장 위치를 묻자 한 위원장이 방향을 가리키며 답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방문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날 둘의 만남은 전격적이었다. 이날 공식 외부 일정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화재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서 현장 방문을 결정했다. 한 위원장도 이날 오전 일정을 조정해 현장을 찾으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윤 대통령은 오후 1시 30분, 한 위원장은 이보다 30분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30분가량 화재 현장을 둘러본 두 사람은 대통령 전용 열차로 함께 상경했다.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날씨가 안 좋은데 같이 타고 갑시다”라고 말하자, 한 위원장은 “자리 있습니까”라고 호응했다. 둘은 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1시간가량을 마주 앉아서 왔다. 다만, 대통령실 참모들과 당·정부 관계자들도 주변에 함께 있어 이날 독대 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열차에 함께 탄 국민의힘 관계자는 통화에서 “김 여사 이슈나 사천 논란 같은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며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 등에게 ‘민생 문제를 각별히 챙겨달라’고 당부하고, 옆에 있던 장관들에게는 ‘당에 보고를 잘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전했다. 다른 동석자는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옛날 검사 시절 추억담을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통화에서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한 위원장은 갈등 봉합 여부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저는 대통령님에 대해서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변함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저는 민생을 챙기고 국민과 이 나라를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저는 지금보다 더 최선을 다해서 4월 10일 총선에 국민의 선택을 받고 이 나라와 우리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는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열차에서 어떤 얘기를 나눴나.

“여러 가지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 주고받고 길게 나눴다.”

-대표직 사퇴 요구 관련해서 갈등이 불거졌는데.

“그런 것보다는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를 서로 나눴다.”

이날 만남에 대해 여권에선 “갈등 봉합 국면으로 급선회 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화재 현장에 함께 간 국민의힘 고위 인사는 통화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웃으며 악수하고, 거의 포옹하다시피 했다”며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여권 고위 관계자도 “최악의 갈등 국면은 끝난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윤 대통령이 ‘한동훈 비대위’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방문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피해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대통령실

다만, “갈등 기류가 완전히 걷혔다고 보긴 섣부르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갈등의 발단이 된 ‘김경률 사천(私薦) 논란’과 ‘김 여사 명품백 관련 윤 대통령의 사과 여부’ 등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한 위원장은 지난 17일 김경율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출마를 언급하면서 ‘사천’(私薦)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김 비대위원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해 과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거론하고, 한 위원장 역시 “국민이 걱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 등 발언을 연일 내놓으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이후 윤 대통령은 이관섭 비서실장을 통해 한 위원장의 사퇴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 위원장이 이에 대한 거부 입장을 밝히면서 파장이 커졌다.

여권에선 갈등 봉합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거론된다. 한 위원장이 ‘김경률 비대위원 사퇴’ 카드를 쓰고, 윤 대통령 역시 명품백 이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안 보이는 중이다. 명품백 이슈만 해도 대통령실 내부에서부터 “몰카 피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김 여사와 가까운 여권 인사), “총선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선 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대통령실 관계자) 등 백가쟁명 중이다.

국민의힘 상황도 비슷하다. 한 위원장은 이날 상경 뒤 서울역에서 “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김 비대위원의 사퇴 관련 언급은 없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없었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어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답 없이 자리를 떴다.

현일훈ㆍ박태인ㆍ전민구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