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90도 인사'하자, 尹 '어깨 툭' 쳐…"민생 얘기만 주고 받았다"
전국에 냉동고 한파가 불어닥친 23일 오후 1시40분. 전날 대형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 특화시장 일대도 영하 6.3도, 체감온도 11.1도로 예외가 아니었다.
눈바람이 거세 서 있기도 힘든 날씨 속에 녹색 민방위 점퍼 차림을 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에서 내린 윤석열 대통령이 기다리던 한 위원장을 알아보고 다가갔다. 한 위원장이 허리를 90도로 숙인 뒤 인사하며 웃자, 윤 대통령도 한 위원장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명품백·사천(私薦) 논란’으로 충돌하던 두 사람은 이날 이렇게 만났다.
남색 패딩 점퍼를 입은 윤 대통령은 유의동 정책위의장, 피해 지역이 지역구인 장동혁 사무총장, 충남이 지역구인 정진석·홍문표 의원 등과도 인사를 나눴다. 현장에는 150여 명의 피해 상인들도 있었다.
윤 대통령이 화재 현황을 보고받으려 걸어가자 한 위원장은 두 손을 모은 채 뒤따랐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을 비롯한 당·정 관계자들은 소방 당국으로부터 화재 발생 원인과 피해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11시 8분 서천특화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점포 227개가 불에 탔으며 두시간여 만에 큰 불길을 잡았다. 보고를 듣던 윤 대통령은 몇 가지 질문도 했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 한 발자국 뒤에서 같이 보고를 들었다. 윤 대통령이 화재 현장 위치를 묻자 한 위원장이 방향을 가리키며 답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이날 둘의 만남은 전격적이었다. 이날 공식 외부 일정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화재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서 현장 방문을 결정했다. 한 위원장도 이날 오전 일정을 조정해 현장을 찾으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윤 대통령은 오후 1시 30분, 한 위원장은 이보다 30분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30분가량 화재 현장을 둘러본 두 사람은 대통령 전용 열차로 함께 상경했다.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날씨가 안 좋은데 같이 타고 갑시다”라고 말하자, 한 위원장은 “자리 있습니까”라고 호응했다. 둘은 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1시간가량을 마주 앉아서 왔다. 다만, 대통령실 참모들과 당·정부 관계자들도 주변에 함께 있어 이날 독대 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열차에 함께 탄 국민의힘 관계자는 통화에서 “김 여사 이슈나 사천 논란 같은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며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 등에게 ‘민생 문제를 각별히 챙겨달라’고 당부하고, 옆에 있던 장관들에게는 ‘당에 보고를 잘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전했다. 다른 동석자는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옛날 검사 시절 추억담을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통화에서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한 위원장은 갈등 봉합 여부를 묻는 기자들 질문에 “저는 대통령님에 대해서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변함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저는 민생을 챙기고 국민과 이 나라를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저는 지금보다 더 최선을 다해서 4월 10일 총선에 국민의 선택을 받고 이 나라와 우리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는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열차에서 어떤 얘기를 나눴나.
“여러 가지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 주고받고 길게 나눴다.”
-대표직 사퇴 요구 관련해서 갈등이 불거졌는데.
“그런 것보다는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를 서로 나눴다.”
이날 만남에 대해 여권에선 “갈등 봉합 국면으로 급선회 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화재 현장에 함께 간 국민의힘 고위 인사는 통화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웃으며 악수하고, 거의 포옹하다시피 했다”며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여권 고위 관계자도 “최악의 갈등 국면은 끝난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윤 대통령이 ‘한동훈 비대위’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다만, “갈등 기류가 완전히 걷혔다고 보긴 섣부르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갈등의 발단이 된 ‘김경률 사천(私薦) 논란’과 ‘김 여사 명품백 관련 윤 대통령의 사과 여부’ 등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한 위원장은 지난 17일 김경율 비대위원의 서울 마포을 출마를 언급하면서 ‘사천’(私薦)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김 비대위원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해 과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거론하고, 한 위원장 역시 “국민이 걱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 등 발언을 연일 내놓으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이후 윤 대통령은 이관섭 비서실장을 통해 한 위원장의 사퇴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 위원장이 이에 대한 거부 입장을 밝히면서 파장이 커졌다.
여권에선 갈등 봉합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거론된다. 한 위원장이 ‘김경률 비대위원 사퇴’ 카드를 쓰고, 윤 대통령 역시 명품백 이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안 보이는 중이다. 명품백 이슈만 해도 대통령실 내부에서부터 “몰카 피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김 여사와 가까운 여권 인사), “총선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선 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대통령실 관계자) 등 백가쟁명 중이다.
국민의힘 상황도 비슷하다. 한 위원장은 이날 상경 뒤 서울역에서 “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김 비대위원의 사퇴 관련 언급은 없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없었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어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답 없이 자리를 떴다.
현일훈ㆍ박태인ㆍ전민구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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