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쏙 빼닮은 마틴 루서 킹 목사 아들 62세 별세

최하은 2024. 1. 23. 18:2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둘째 아들 덱스터 스콧 킹이 22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말리부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덱스터 킹은 1968년 4월 4일 아버지 킹 목사가 살해되던 당시 일곱 살이었다.

AP통신에 따르면 덱스터 킹은 변호사로 일하며, 아버지 킹 목사의 유산과 킹 가문의 지적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014년 아버지 킹 목사가 받은 노벨상의 상금을 두고 덱스터와 그의 형이 법정 소송에 이르는 등, 형제간의 갈등이 이어지기도 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故) 덱스터 스콧 킹. 연합뉴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둘째 아들 덱스터 스콧 킹이 22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말리부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2세.

덱스터 킹이 회장을 맡은 애틀랜타시의 킹 센터는 22일 성명을 통해 그가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의 부인 레아 웨버는 성명에서 ‘남편이 잠자는 동안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킹 센터는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이 남편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덱스터 킹은 오랫동안 이곳의 회장으로 일하며, 재단의 열악한 재정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수익을 찾는 등 노력했다.

고인의 이름은 킹 목사가 처음 목회 활동을 시작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에서 따 왔다. 몽고메리는 유명한 ‘로자 파크스’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인종 분리법이 남아 있던 1955년, 시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체포된 사건이다. 흑인들이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시작했고, 같은 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킹 목사가 이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이듬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덱스터 킹은 1968년 4월 4일 아버지 킹 목사가 살해되던 당시 일곱 살이었다. 당시 킹 목사는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청소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암살당했다. 킹 센터의 알 샤프턴 목사는 “덱스터가 그 고통을 활동으로 극복했다”며 “자신의 삶을 바쳐 부모님의 소망이던 모든 인종이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웠다”고 밝혔다. 샤프턴 목사는 “덱스터 킹이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났다”며 애도하기도 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덱스터 킹은 변호사로 일하며, 아버지 킹 목사의 유산과 킹 가문의 지적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킹 센터의 회장 역할 외에도 킹 가문 재산의 책임자로 일했다. 덱스터 킹의 다른 형제들도 가족 재산의 지분과 운영권을 갖고 있었으나, 부모님의 유산에 대한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2014년 아버지 킹 목사가 받은 노벨상의 상금을 두고 덱스터와 그의 형이 법정 소송에 이르는 등, 형제간의 갈등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2004년 회고록 ‘킹으로 자라나기(Growing Up King)’을 출간하기도 했다. 덱스터 킹은 책에서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내가 격식 있고 정제되어야 한다고 느꼈다”며 “격식, 진지함, 확신에 찬 태도 등은 유지하기 어렵다. 완벽하게 평정을 지키도록 타고난 사람이라도 삶에서 비롯되는 온갖 극적인 일들을 겪고 그런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유년기를 지나 어른이 된 그는 아버지 킹 목사의 외양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로자 파크스를 조명한 TV 프로그램에 아버지인 킹 목사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덱스터 킹은 그의 형제들과 달리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지 않았다. 형 마틴 루서 킹 3세가 남부 기독교 리더십 회의의 회장을 역임하고, 동생 버니스는 아버지를 이어 인권운동가이자 목사가 됐다. 그러나 덱스터 킹은 1997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나는 스스로를 매체에서 그리는 것처럼 지도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그것이 나에게 있어 최선의 운명은 아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하은 인턴기자 jonggyo@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