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식 강요하는 교사, 이 수업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

김상목 2024. 1. 2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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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클럽 제로>

[김상목 기자]

 영화 <클럽 제로> 포스터 이미지
ⓒ 판씨네마㈜
 
2020년대 한국사회에서 '학교'는 모든 게 가능한 만능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전근대 사회에선 오직 가족, 그것도 여성에게 전가되다시피 했던 미성년 구성원 돌봄과 보육은 물론, 어느새 사실상 계급사회로 회귀 중인 가운데 학력자본을 형성하는 가장 큰 부분인 대학입시도 책임져야 한다. 촉법소년 논쟁이 뜨거운 가운데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청소년들의 윤리와 도덕 문제도 감당해야 하고, 학교급식을 통해 식생활도 담보해야 한다. 사실상 청소년 시기 동안 가족을 대신해 학교가 교육은 물론 일상생활을 관리 및 감독할 책임주체가 된 셈이다.

부모는 학교에 더 많은 몫을 기대하고, 방학이 돌아오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현재도 교직원들은 학교가 과도한 부담에 시달린다며 울상인 상태다. 결국 추가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되는 상류층은 별도의 부담을 감수하면서 예외적인 사례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다시 우열을 나누고 타인의 이목을 살피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테다.

물론 이런 교육의 계급(계층)화 현상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명목상 한국의 교육체계는 평등교육 목표에 상대적으로 부합되는 편이다) 상류층이 '귀족학교'에 자녀를 보내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건 서구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경우다. 오스트리아 출신 중견 여성감독 예시카 하우스너의 신작 <클럽 제로>는 그런 상류층 자제들의 기숙학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을 그려낸 현대판 '우화' 같은 작업이다.

'미스 노백'의 기이한 식이요법 워크숍 속으로
 
 영화 <클럽 제로>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뚜렷하게 국가나 시기를 알 순 없지만 중서부 유럽의 동시대적 배경으로 추정되는 시공간 속 한 기숙학교는 물리적 환경으로는 이상적인 학교에 가까운 이미지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현대 건축의 기능적 공공성을 구현한 것처럼 보이는 차갑지만 우아한 학교 공간에서 선남선녀 표본 같은 청소년들이 토론식 수업과 근사한 기숙사, 세심한 교육지도를 누리는 학교에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사회적으로 최상급 지위와 부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학부모회는 한창 자랄 나이의 자녀들에게 더 수준 높은 교육을 위해 별도로 영양교사를 파견하기로 한다. '미스 노백'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독창적인 식이요법과 건강식품 유통으로 일정한 명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수업을 신청한 10명도 채 안 되는 그룹과 미스 노백은 원을 이뤄 토론식 수업을 진행한다. 그는 자신이 좀 독특한 식이요법 지도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왜 해당 수업을 신청했는지 한 명 한 명 이유를 묻는다. 학생들의 답변은 다양하다. 누구는 기후변화를 막고 생태계 파괴를 줄이고자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아이는 과도하게 식량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지구 환경은 물론 가난한 나라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며 오직 대기업의 소비 조장에 놀아나는 것이라 비판한다. 또 다른 학생은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훈련으로 식사습관을 조절하고자 한다. 유일하게 부유층이 아닌 가정의 학생만 전액장학금을 받기 위한 학점 조건을 맞추고자 수업을 신청했다고 답한다. 그 한 명을 제외하면 다들 진취적이고 이타적인 건전한 고민으로 들린다. 미래의 사회지도층다운 모범적 태도다.

하지만 곧 아이들의 실상이 앞선 발표와 대구를 이루듯 드러나기 시작한다. '프레드'는 발레에 소질을 보이는 아름다운 소년이지만 그의 부모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봉사활동에 매진하며 한눈에 봐도 섬세함이 지나쳐 부러질 것만 같은 아들만 기숙학교에 방치하고 있다. (올림픽 종목인) 트램펄린 특기생인 '라그나'는 운동선수로서 최상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사'는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어머니를 닮았는지 먹고 나면 토해내기 일쑤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그중 예외가 한 명 있기는 하다. 유일하게 직장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의, 즉 다른 아이들과 '계급'이 다른 존재인 '벤'만 체력 유지를 위해 고봉밥을 꾸역꾸역 잘도 먹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혼자만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종 취급을 받는다. 미스 노백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속으로 감춰온 분노를 표출하게 해주기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절식에 동참하게 된 아이들은 그를 딱하게, 혹은 혐오스럽게 여기며 사방팔방으로 포위하고 압박하기 시작한다. 벤에 대한 공세는 때로는 설득과 권유로, 어떤 순간에는 무리에 끼워주겠다는 유혹으로, 심지어 동료 여학생의 애정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미스 노백의 수업은 확실히 특이하다. 그는 아이들 각자가 가진 콤플렉스를 세밀히 들여다보고 부모가 놓치거나 방치한 부분을 포착한다. 부모에게 끌려가거나 주변 친구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 주눅 든 아이들에게 식습관의 통제력을 스스로 가지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아이들 각자가 식이요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절식'을 통해 취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아이들은 개별의 논리적 사유로 노백의 권고를 받아들인다. 수업내용이 잘 맞지 않던 아이들은 하나둘 이탈하지만 벤은 끝끝내 나가지 않고 버틴다. 전액장학금 조건을 이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벤만 주위에서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간다.

노백은 부모와 떨어져 외로움을 느끼는 프레드에게 애착을 보이며 기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부모와의 갈등을 품고 있던 라그나와 엘사도 점점 자연스럽게 노백의 가르침에 따른다. 이제 노백은 자신과 친밀해진 아이들과 함께 벤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벤의 어머니는 너무 부담을 갖지 말고 차라리 공립학교로 옮기자고 아들에게 권하지만 어머니가 홀로 직장에 다니며 고생하는 게 미안한 벤은 어떻게든 장학금을 타고자 한다. (수업에 따라오지 않으면 장학금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는) 노백의 은근한 협박과 함께 자신들의 그룹에 들어오지 않으면 고립시키겠다는, 사실상 '왕따' 행위를 채찍과 당근으로 제시하는 다른 아이들의 요구에 벤은 결국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노백은 점점 더 절식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중세 전래동화의 21세기 학교 버전
 
 영화 <클럽 제로>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은 그림 형제의 동화로 잘 알려진 '하멜른의 쥐 잡이(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21세기 상류층 기숙학교라는 배경에서 풀어내려 한다. 쥐떼의 창궐로 몸살을 앓던 하멜른 시의 시장과 유지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한데로 몰아가 퇴치한 덕분에 한시름 놓았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그에게 약속한 보수가 아까워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화가 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도시 전체의 아이들을 피리 소리로 매혹시켜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다. 오직 귀가 들리지 않아 피리 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 한 명만 뒤처져 남는다. <클럽 제로>는 놀라울 만큼 이 전래동화 기본 줄거리의 판박이 형태를 취한다. 결말은 결국 하멜른의 어른들이 아이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혹자는 아이들이 다 죽음을 맞았다고 해석하고, 다른 이는 이들이 고향을 떠나 소년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다 모두 노예로 팔려갔거나, 혹은 외진 오지 개척과 식민사업에 동원되었다고 판단한다. 어떤 결론이건 간에 생과 사를 초월해 부모세대와 단절된 운명을 맞았다는 건 동일하다. 결말 역시 영화는 모호한 마무리로 중의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만큼 그저 어릴 적 읽고 깜깜해진 그림 형제의 동화책이 내포한 원문 내용을 소화해야 해당 작업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는 셈이다.

13세기에 소도시에서 130명의 아이가 실종된 역사적 사건을 기원으로 하는 전래동화가 700여 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내려앉은 영화 속 배경은 사회 최상류층이 다니는 기숙학교다. 이 학교는 입시교육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체육과 음악, 미술 같은 문화예술 소양은 물론 인문교육 위주로 교양과 신체단련까지 골고루 가르친다.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회에 참여하는 부모들 역시 서로 겉으로는 친화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미스 노백의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각자의 감추고픈 모순적 이면을 가진 것처럼 부모들 역시 겉으로 보이는 자녀에 대한 애정이나 그들이 물질적으로 베푸는 배려 외엔 제대로 된 훈육이나 보살핌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이중의 실패: 부모와 학교의 책임전가 속에서

<클럽 제로> 속 부모들은 모두 일그러져 있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자녀만 홀로 남겨두고 아예 해외에 있거나, 자신이 못 이룬 한계를 자녀에게 과다하게 투영하거나, 자신들의 선택이 실수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하는 등 이 영화 속 부모들 중 제대로 된 어른으로 조명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물리적 시간이 제일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처지인 벤의 홀어머니만 가장 먼저 위기를 인식하고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다른 학부모들의 방관과 무책임 때문에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와 보내는 짧은 시간 중에도 직접 요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사태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손수 만든 음식을 자녀와 나누려 할 뿐이다. 벤의 어머니가 고단한 퇴근 후에 손수 준비한 소박한 만찬은 어쩌면 자식을 구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어머니의 애정에 자식 또한 감사해 하지만 그는 그 감사를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야 만다. 건조하게 묘사되는 이야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슬픔이 깃든 장면으로 꼽을 수 있겠다. 

부모들은 비싼 돈을 들여 좋은 기숙학교에 보냈으니 자신들은 할 일 다 했다며 안심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더 욕심을 내어 학부모회의 권위로 부모가 선택한 교사를 별도로 파견한다. 그리고 교장은 학부모회의 재정지원 때문에 다른 교사들의 우려와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켜보자며 방조로 일관한다. 그 역시 미스 노백의 확신에 찬 식이요법에 정작 내용은 확인도 않고 찬동한다.

그런 교장의 행태는 또 다른 전래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맹신하기만 할 뿐 정작 이성적 사고와 맡은 책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한 우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어떻게든 사태를 봉합하고자 할 때에도 미스 노백이 감춰둔 진짜 계획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 채 추문이 될까봐 외형적인 문제에만 골몰한다. 부모의 실패에 이어 학교의 실패도 연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두 집단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애써 억지 논리로 실상을 회피하려 할 뿐이다.

서구사회의 세대갈등과 반문화 경향을 소환하다
 
 영화 <클럽 제로>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미스 노백은 전형적인 '확신범'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식이요법 외에는 다른 도락도, 인간관계도 전혀 없어 보인다. 외톨이인 것이다. 그래서 노백은 각자 마음의 공백을 감추고 있던 소수의 제자들을 훤하게 꿰뚫어 볼 수 있다. 물질적 풍요로만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을 노백은 한눈에 알아보고 부모와 학교가 직무 유기하는 틈을 후벼낸다. 의지할 곳 없는 프레드가 가장 먼저 노백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만 봐도 노백의 비합리적 학설이 먹혀드는 건 기존 가족과 사회가 방치한 허점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제자들처럼 제대로 부모나 학교의 돌봄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강렬한 불신과 분노를 품고 있는 존재다. 그는 이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랬던 것처럼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동화와는 달리 노백의 논리와 주장에는 유럽사회가 20세기 전반을 지나면서 겪었던 세대갈등과 문화충돌의 기운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과 그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막지 못한, 파시즘 전체주의에 경도되어 오히려 방조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참한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렇게 존경심이라곤 상실한 청년세대가 기존의 모든 질서와 문화에 대항하던 '반-문화' 현상을 <클럽 제로> 속 미스 노백과 그의 수업을 듣는 제자들이 우화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봐도 이 영화는 하등 무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서 노백과 제자들의 그룹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관객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양할 테다. 누군가는 68세대 중 극단화된 그룹의 자멸적 흐름, 흔히 '적군파'라 불리던 이들의 테러리즘 추구를 떠올릴 테고, 다른 누군가는 일종의 '컬트'화된 사이비 공동체 혹은 초소형 이단에 가깝다고 평가할 것이다. 채식과 절식을 혼합해 검증되지 않은 식이요법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지점에서 어떤 이는 채식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비합리적 투쟁을 예방하기 위한 고민을 던지는 영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사실상 섭식장애, 즉 거식증 상태로 떨어진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선 해당 증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기보다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렇다는 투의 몰이해가 남아 있지만,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해당 증상이 거의 최초로 목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세속의 물질을 멀리 하려는 이들이 중세 말 교회의 세속화 및 타락 가운데 반작용처럼 유행했고 채식주의를 뛰어넘는 무모한 도전이 이어졌다. 그중 '성녀'로 치성된 시에나의 '카타리나' 경우는 16살부터 빵과 물과 생야채만 먹었고, 23살부터는 성체 빵과 냉수만 먹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금식하는 걸 알고 방해할까봐 식사를 남들과 함께 한 뒤 쓴 풀을 뭉친 경단을 씹어 토해냈다고 한다. 그 결과 33살에는 아무것도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 죽음을 맞았다. 이 과정은 <클럽 제로> 중반부 이후 고스란히 등장인물들에게 닥친다.

그런 영화 속 인물들의 금식은 부모나 학교에 대한 '단식투쟁' 성격도 강렬하게 지닌다. 미스 노백은 계속 제자들에게 기성사회의 강요와 부모의 통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아이들 역시 규격화된 기성품처럼 자신들을 찍어내려는 부모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부모에게 물질적 자원을 의존해야 할 아이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자신들의 신체와 건강뿐이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자면 <클럽 제로> 속 캐릭터들의 말도 안 되는 행태는 정치적 단식투쟁과 본질적으로 잇닿아 있는 셈이다.

물론 그들의 '투쟁'은 합리적인 사고와 풍부한 사회적 체험이 결여된 채다. 하기에 결국 독립된 주체로 성장하지 못한 채 노백의 선동을 전적으로 수용해 파국으로 치닫고 말 운명이다.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 해도 그들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부모세대의 모든 걸 증오하며 거부하는, 그저 역편향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아이들의 극단화에 감정적 개입 대신 건조한 관찰자의 시선과 이를 떠받치는 화사해 보이지만 차가운 색조 이미지, 그리고 불길한 기운이 서린 최소화된 불협화음의 사운드트랙으로 채워진 배경을 덧붙여 완성한다. 그렇게 겉으로만 풍요로운 서구의 유토피아는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종말론적 우화로 <클럽 제로>는 종결된다. 21세기에 부모의 역할, 학교의 책임, 교육제도와 사회구조의 위기를 가득 버무려낸 그로테스크한 뒷맛으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돌아왔다. 한국사회의 작금 현실에도 찰떡궁합으로 고민을 던지는 영화다.

<작품정보>

클럽 제로 Club Zero
2023|오스트리아|미스터리/스릴러
2024.01.24.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주연 미아 와시코브스카(미스 노백 역)
출연 루크 바커(프레드 역), 플로렌스 베이커(라그나 역),
크세니아 데브리엔트(엘사 역), 사무엘 D. 앤더슨(벤 역)
수입/배급 판씨네마㈜

2023 76회 칸 영화제 본선경쟁 초청
2023 36회 유럽 아카데미 음악상
2023 56회 시체스 영화제 음악상
2023 30회 유로피안 영화제 특별언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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