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있는 엄마가 죽었대요"…북한판 『안네의 일기』 담긴 참상

전수진 2024. 1.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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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은경이 일기』의 삽화. 북한연구소 제공


고교생 은경이는 고민이 많다. 추운 날씨에 바지 대신 교복 치마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야 하는 게 귀찮고, '칼 군무'를 해야 하는 집단체조 연습도 하기 싫고, 영화나 드라마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건 슬프다. 여느 고교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은경이는 사실 북한 이탈주민이다. 22일 발간된 『은경이 일기』(북한연구소)의 주인공이다. 은경이가 매기 귀찮았던 빨간 넥타이는 북한 노동당에 충성하는 소년단의 상징이며, 집단체조는 북한의 체제 선전용 매스 게임이고, 그가 보고 싶지만 보지 못했던 영화와 드라마는 남측의 것이었다. '장군의 아들' 영화를 몰래 봤다는 이유로 "세상에 (북한 김정일) 장군 외엔 장군이 없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곳에서, 은경이는 탈출해 자유를 찾아 남으로 왔다.

이젠 30대 초반에 아이 두 명의 어머니인 그에겐 소원이 하나 있다. "나의 아이들이 내가 북에서 왔다는 걸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는 것. 은경이와 함께 책을 펴낸 김영수 북한연구소장이 지난 19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전한 내용이다. 인터뷰에 김 소장이 대신 나온 까닭이다. 은경이가 직접 쓴 부분도 있지만 구술을 하고 김 소장이 글로 엮은 부분도 많다. 은경이는 본인이 택한 가명이다. 김 소장은 이 책을 "북한판 '안네의 일기'"라고 표현하며 "수용소 이야기 대신 북한 주민들의 생생한 일상 이야기만으로도 북한의 인권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수 북한연구소장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은경이가 처음부터 책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 그는 김영수 소장이 서강대에서 북한학을 가르치던 시절, 학생이었다. 김 소장은 "어느 날 은경이가 찾아오더니 '교수님, 저 자꾸 북에서 있었던 기억이 안 나요'라고 했다"며 "그럼, 일기를 써보면 어떨까 제안했는데, 필력이 놀라워서 책을 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엔 책을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은경이의 엄마가 아직 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명으로 책을 낸다고 해도 엄마와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었기에 책은 포기했다. 곧이어 팬데믹까지 거치면서 원고는 묻히는 듯했다. 그러다 지난해, 북한연구소장을 김 전 교수가 맡은 뒤, 은경이에게 연락이 왔다. "교수님, 우리 엄마 죽었대요. 책 내요, 우리."

밤에 몰래 남측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장면을 삽화로 담은 『은경이 일기』(북한연구소). 북한연구소 제공


책은 은경이가 학교와 집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시계열 순으로 펼쳐낸다. 중간중간 만화 삽화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사로청 지도원(사회주의 애국청년동맹 지도원)'이나 '맵짜다(멋지고 세련됐다)' 등의 북한식 용어엔 따로 설명을 붙였다. 김 소장은 "감옥이나 수용소 얘기 대신 은경이가 농활 가고, 추석 명절 쇠는 그야말로 생활감 가득한 이야기들"이라며 "북한이 가부장적이긴 하지만 은경이 엄마는 아빠에게 반말하고, 은경이도 부모님에게 반말로 얘기하는 등의 에피소드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도 읽고 나면 마음에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우리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영수 소장은 "은경이 후속으로 남학생의 이야기도 구상 중이고, 무엇보다 북한 장애인의 인권을 위한 책도 내고 싶다"며 "지난해부터 탈북 장애인 돌봄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면담도 연구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민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분들이 가진 트라우마와 상처를 달래줄 방안이 필요하다"며 "정신과 치료 바우처를 발급하는 것 등도 방법일 것"이라고 전했다. 그가 특히 북한이탈주민 중 장애를 가진 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북한엔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가 없이, '병O' '칠뜨기' 등의 말을 아직도 쓴다"며 "그런데 북한에 '그 병O이 남조선 가더니 사람대접 받는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탈북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이들을 보듬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은경이 일기' 표지. 5000부 이상이 판매되면 은경이를 상징하는 새장 속 새가 밖으로 훨훨 날아가도록 표지를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북한연구소 제공


김 소장은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이탈주민의 인권 보호를 강조한 내용을 언급하며 "3만 탈북민의 대다수인 여성의 인권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산적해 있다"며 "이들의 심리 건강을 도울 수 있는 여성 활동가들을 육성하는 것도 북한이탈주민 인권 사각지대를 찾아가는 방법이 될 것"이라 조언했다.

책 출간은 또 다른 시작이다. 북한연구소는 현재 영어 및 일본어판과 웹툰 출간을 준비 중이다. 외국어판은 더 많은 독자에게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세를 받지 않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김 소장이 오랜 기간 전국 각지에서 진행해온 북한이탈주민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연극에도 은경이의 스토리가 등장한다. 그는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북한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도 은경이를 포함한 많은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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