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로비'로 사돈되더니, 왕 자리까지 넘본 가문
[김종성 기자]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 |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여요전쟁) 중인 1011년에 일종의 '옷 로비'가 있었다. 고려 현종시대 역사를 담은 <고려사> 현종세가에 따르면, 요나라 군대가 압록강 너머로 철수한 지 나흘 뒤인 음력으로 현종 2년 2월 3일(1011년 3월 10일) 현종은 지금의 충남 공주에 당도했다.
현종 일행은 지금의 전주와 익산을 거쳐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공주에 체류한 이 일행이 청주를 거쳐 개경으로 귀환한 것은 음력으로 그달 23일(양력 3월 30일)이다.
현종은 공주에서 엿새간 머물렀다. 그 6일 동안에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장녀가 옷을 지어주는 일이 있었다. 선물의 형식으로 주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은 옷 로비였다. 옷을 지어준 딸은 그 뒤 원성왕후(제3왕후)가 되고, 또 다른 딸들은 원혜왕후(제4왕후)와 원평왕후(제7왕후)가 됐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현종이 김은부 집안의 환대를 얼마나 감사했을지를 느낄 수 있다. <고려사> 김은부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처음에 개경에서 남쪽으로 피난할 때도 공주를 거쳤다. 이때도 김은부는 의복을 선물했다.
김은부열전은 "왕이 비로소 옷을 갈아입었다"고 말한다. 개경을 떠난 현종이 공주에 가서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이다. 밤중에 도성을 떠나다 보니 의복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듯하다.
김은부는 공주를 떠난 현종이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을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제공했다. 왕족은 식사를 3끼 이상 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종에게 점심을 줬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물자가 부족한 와중에도 김은부가 하루 2끼를 준비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갈 때 그의 딸이 어의를 선물했던 것이다.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 |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은 이 인연을 바탕으로 김은부(조승연 분)가 현종(김동준 분)의 주목을 받고 뒤이어 형부시랑이 되어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했다고 스토리를 이어간다. 드라마 속의 김은부는 지방 호족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견제할 지방관을 증파하는 사안을 추진한다. 강감찬(최수종 분)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이에 개의치 않고 수단·방법을 불문하며 개혁을 밀어붙인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역사기록의 대부분은 왕들의 입장에서 서술됐다. 그러다 보니 개경 군주가 지방세력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것을 무조건 개혁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현종 때의 지방관 증파가 우리 시대 관점에서도 개혁이 되려면, 이 조치가 고려왕조 대중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
<고려거란전쟁>은 김은부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조정이 마비되고 강감찬도 파면을 당했다는 식의 꽤 과장된 방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한다. 하지만, 옷 로비 뒤에 실제의 김은부가 경험한 것은 드라마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1010년 3월의 옷 로비로 인해 이민족에게 억류되는 사고까지 겪었다. 옷 로비의 결과로 불행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고려거란전쟁>은 원성왕후(하승리 분)의 옷 선물이 김은부와 현종을 가깝게 만들어준 측면만 묘사하지만, 이 선물로 인해 김은부는 두 명의 군주와 공간적으로 가까워지게 됐다. 김은부 열전에 따르면, 옷 선물 직후에 김은부는 형부시랑이 되어 현종 가까이로 가게 됐다. 그런 뒤 요나라 성종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요나라로 떠났다. 현종세가는 현종 2년 11월 13일(1011년 12월 10일)에 김은부가 사신에 임명됐다고 기술한다.
요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제2차 고려거란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 본인이 직접 압록강을 넘어 전쟁을 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런 요성종을 가까이 가서 만난 일은 김은부의 신상에 불리한 상황을 초래했다.
김은부 열전은 성종의 생일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김은부가 압록강에 떠 있는 내원성이라는 섬에서 붙들렸다고 말한다. 김은부를 붙잡은 쪽은 여진족이지만, '좌표'를 찍어줘 붙잡히게 만든 쪽은 요나라였다. 고려와 여진족을 이간시키는 일에 김은부의 신병이 활용된 셈이다.
김은부는 여러 달 동안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여진족 입장에서도 고려 사신을 해치거나 무한정 묶어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옷 선물 덕분에 현종의 신임을 받은 것이 이런 아찔한 경험으로까지 연결됐던 것이다.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 KBS |
그 같은 측면도 있었지만, 옷 선물은 크게 보면 김은부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작용을 했다. 이는 이 가문을 왕실 외척으로 격상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집안과 연계된 또 다른 가문까지도 왕실 외척으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은부열전은 김은부가 1017년에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김은부 부부, 김은부의 부모, 김은부의 장인을 높이 추존했다고 알려준다. 김은부의 장인인 이허겸은 소성현 개국후(邵城縣 開國侯)로 책봉됐다. 봉건 제후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소성현은 지금의 인천에 있었다. 이곳은 인천 이씨(경원 이씨, 인주 이씨)의 본거지다. 이 가문이 전국적인 명문가로 일어선 계기는 이허겸에 있었다. 그가 봉건제후 비슷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에 관한 <고려사> 이자연 열전은 이허겸이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을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이씨 가문의 역사를 서술했다. 옷 선물을 계기로 김은부의 가문이 왕후족이 된 것이 김은부의 처가인 인천 이씨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자연의 세 딸은 제11대 문종에게 시집갔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호의 딸은 제12대 순종에게 시집갔다. 이호의 손녀인 이자겸의 딸들은 제16대 예종 및 제17대 인종에게 시집갔다. 김은부 집안의 옷 선물이 이허겸의 지위를 높이고 이것이 이씨 가문을 왕실 외척으로 만드는 작용을 했던 것이다.
고려 인종 때 절정에 달한 이씨 가문의 권세는 현대 한국인들이 익히 아는 사건인 이자겸의 난(1126)과 관련이 있다. 이자겸은 절정의 권세를 이용해 인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했다. 극도로 억압된 인종이 왕권을 넘긴다는 조서까지 작성했을 정도다. 1126년에 인종이 이자겸 정권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면, 고려는 건국 200년 만에 문을 닫았을 수도 있다.
이자겸 사건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 묘청의 난이다. 이자겸을 몰아내고 기득권층에게 불안감을 느끼던 인종의 심리 상태를 1128년부터 움직인 쪽이 묘청 세력이다. 이들은 서경(평양)으로 천도하자고 인종에게 권유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113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됐다.
이자겸의 난은 이허겸의 지위 상승을 발판으로 이씨 가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벌어졌다. 묘청의 난은 이자겸 집안이 몰락한 뒤의 정치적 진공 속에서 발생했다.
▲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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