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일의 시간, 픽션으로 완성해 낸 청춘의 온기와 미소
[조영준 기자]
▲ 영화 <와일드 투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미야케 쇼 감독의 위치는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이후 조금 더 공고해진 것 같다. 체육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 앞에서 홀로 섀도우 복싱을 하던 케이코(키시이 유키노 분)를 들여다보던 그의 시선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평범한 일상과 반복되는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일반적인 복싱 드라마에서의 희열이나 쾌감 같은 것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20)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야케 쇼는 극 중 세 사람의 청춘 위에 어떤 특별한 단어도 새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했던 이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투영하는 것만이 그의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자리를 바라보는 것까지. 아무튼, 여전히 나아갈 길이 훨씬 더 길고 선명할 그가 <드라이브 마이 카>(2021), <우연과 상상>(2022)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함께 현재 일본 영화계의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영화 <와일드 투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나름의 픽션을 담아냈다고는 했으나 영화 전체가 만들어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자연과 시간을 축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을 축으로 하는 극영화의 형식 양쪽 모두를 오가고자 한다. 영화는 2018년 2월 3일부터 4월 14일까지, 약 70일간의 현실 속 시간을 기반으로 한다. (이 기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 흐름은 정확한 날짜의 형태로 스크린에 표기되고 있다.) 이 작품이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는 픽션을 재현하는 방식에 가깝다.
현실의 시간축에 기대고 있는 이야기는 야마구치 DNA 도감 제작이라는 워크숍으로부터 시작된다. 야마구치 지역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활동이다. 모임에 참석한 구성원들이 야마구치 현에 존재하는 생물과 미생물을 채집, DNA를 조사하고 식생을 확인해서 도감을 만든다. 워크숍을 이끄는 것은 대학 신입생인 우메 나카조노(호노카 이토 분)를 비롯한 연구소의 과학자들. 슌(야수미츠 류타로) 분과 타케(오스케 쿠리바야시 분)를 비롯한 현의 중고등학생인 참가자들이 산과 해변 등지로 나가 야마구치가 원산지인 식물을 기록하고 채집하는 동안 그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실재를 기반으로 한 픽션을 통해 영화가 바라보고자 하는 지점은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감정이다. 지역의 자연환경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과정을 작품이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동안에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또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 과정에 초점을 두게 된다. 특별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선형성에 기대고 있는 전통적인 서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그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린 감정의 생동과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 더 나아가 지역 사회에 대한 어떤 연대를 이 영상 위에 그려내고자 할 뿐이다.
03.
단순한 구조를 하는 서사와 달리 이를 보여주기 위한 영상의 형태는 꽤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특징 중 하나다. 등장인물의 시선에 맞춘 아이 레벨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곤 있지만, 현미경이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이질적인 시선이나 풋티지 컷을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 그리고 화면 너머로 투영되는 장면들(이중노출)은 단면의 서사를 다면적인 화면으로 구현하는 데 큰 몫을 해낸다. 이는 (이 작품 전까지) 스마트폰의 동영상 기능만을 이용해 비디오 다이어리 형태로 활동을 이어온 미야케 쇼 감독의 실제와도 맞닿아 있다.
이와 같은 감독의 선택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이들이 연기를 해내는 과정에서 느끼거나 보일 수 있는 약간의 이질적인 감정과 거리선을 무너뜨리는 데도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감독과 일반인 배우들은 감정의 전달에 종종 실패했고, 이를 위해 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모니터 하고 의견을 나눴다고 알려져 있다. 세상에 감춰져 있는 생명체의 표본을 발견하고 채집하고자 하는 열정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설프게 터뜨리고 마는 꽃망울 같은 사랑 사이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 감독은 다양한 시선으로 이들의 시간을 기록한 셈이다.
▲ 영화 <와일드 투어> 스틸컷 |
ⓒ 디오시네마 |
영화 속에 놓인 이들은 모두 늘 '찾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여기에는 뚜렷하고 분명한 목적이 있는 탐색도 있고, 또 어떤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될 무엇을 향해 이뤄지기도 한다. 영화 바깥에 놓여 있는 미야케 쇼 감독 역시 그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어떤 장면은 강한 의도와 시도에 의해 완성된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딘가는 우연과 흐름에 기대 조립된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행위가 이 영화가 따르는 탐험 혹은 여정의 의미와 목적에 조금도 배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의 사정과 환경이 다르기에 같은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더라도 각자가 바라보는 곳과 마음이 향하는 자리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찾을 수 없는 의미와 지금은 닿을 수 없는 내일이 가끔 찾아오기도 하는 것 또한 인생이고. 작품 속 인물들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도 애정하게 되는 것은 그 문턱 앞에서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정 그 자체는 거칠고 힘겨울지 몰라도 그들의 얼굴 위에서 청춘의 온기와 미소를 담아내려는 감독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DNA 어딘가에 새겨진 내일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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