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1980년 2월 창당 시도, 명확한 사실"
[구영식 기자]
-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5월 20일~27일 총 81시간 광주에 머문 이유
https://omn.kr/27394
- "80년 5월 31일 국보위 임명장 받으러 간 날, 집권계획 감 잡았다"
https://omn.kr/273zl
▲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
ⓒ 연합뉴스 |
수신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발신 :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
주소 : 경기도 과천시 사기막길 1**-1 (문원동)
주민번호 : 3209**-1055*** 전화 : 010-25**-64*
본인은 2021년 2월 4일 제출한 진정서에 누락되었던 1980년 5월 이전과 이후 있었던 월별 중요 사건 중 기억이 나는 내용에 대하여 추가 진술서를 제출합니다.
1. 19+80년 1월 - 본인의 <전두환 장군 대통령 지지> 여부에 민감한 전두환 장군
가. 김충립 보안반장이 전두환 사령관을 면담하고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제가 전두환 사령관이 군으로 복귀해야 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정호용 장군도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고 김 소령은 <이번 여론조사는 보안부대원에게만 국한된 사항이라 정 장군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하였다는 보고를 하면서 <보안사령관이 정호용 장군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하여 신경을 쓰더라.>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나. 본인은 이 보고를 받고 보안사령부 내부 일이고, 본인은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전두환 장군도 제가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1980년 2월- 창당자금 모금
가. 2월 초, 전두환 사령관실에서 전 장군과 정치 활동이 재개되어 복잡한 시국이 전개된다는 대화를 하던 중 <참모들이 정당 창당을 하려는 모양인데 어디서 자금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나. 귀대하여 김충립 소령에게 <정당 창당자금이 필요하다는데 어디서 자금을 모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더니 김 소령이 <박재홍씨가 여의도 빌딩을 팔아서 80억을 들여 창당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자금이 필요한 모양이군요. 제가 한번 알아보겠는데 타진은 제가 하지만 사령관께서 그분들과 만나 직접 대화를 해야 될 것>이라며 1주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 1979년 10·26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을 맡았던 허화평 전 의원.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라. 다음날 제가 보안사령부에 가는 길에 김충립 소령이 <모금 내역을 적은 메모지>를 전해 주면서 이 내용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직접 전해야지 다른 사람, 특히 허화평 대령에게 전달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중앙정보부 자금을 쓰면 외부자금 유입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으며 정치자금을 내서 창당에 도움이 되면 충신이 되겠지만 정치자금 헌금을 내겠다고 제안을 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역적으로 몰리는 위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두환 장군이 허화평 대령이 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하여 모금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려니 생각하고 그만 허화평 대령에게 전달하고, 자금이 필요하면 이분들에게 연락하여 쓰라고 이야기해주고 귀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허화평 대령은 본인에게 창당을 한다는 정보가 알려진 것을 두려워하고 감추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 3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김 소령이 <박보희 총재가 초죽음이 되어 전화를 걸어와 "허화평 비서실장이 내일 아침 10시 이전에 한국에서 떠나라. 그 시간 이후에는 체포하겠다. 죄목은 정치자금법 위반이고 조사에 따라 반국가 음모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바.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자 난감했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본 결과 이 시점에서 사건을 수습하려고 어떤 조치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허화평의 지시대로 박 총재가 외국으로 출국하고 당분간 귀국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김 소령에게 수습하라는 지시를 한 일이 있습니다.
사. 다음 날 아침 7시, 김 소령이 출국하는 박보희 총재를 한남동 소재 국일관에서 만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오해가 생겨서 어렵게 되어 미안하다. 그러니 잠시 피신하라>고 이야기하였고 박 총재는 출국을 하였습니다. 결국, 정치자금을 낼 용의가 있던 한 사람은 강제출국 당하였고, 이 일을 주선했던 본인은 허화평 대령에 의해 수모를 당하였지만 1980년 2월에 정당 창당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은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창당자금 건은 잠잠해졌으며 실제 창당은 1980년 9월에 시작되었습니다.
3. 1980년 4월 - 언론통폐합 반대
가. 4월 초,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수시로 일본 언론 기자와 정치인들을 특전사 훈련장에 데려와 참관을 시키고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을 막고 보안 조치를 잘하라는 지시를 김충립 보안반장에게 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 4월 중순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이 본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언론통폐합법>을 브리핑하기에 <잘못된 것 같다. 김충립 소령과 새로운 법을 만들어 보라>고 한 사실이 있으나 결론은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같은 비난을 듣게 되어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이 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 법의 개정은 6개월 후, 5공 정부에서 허문도씨 주도로 법을 만들고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졌는데 저와는 관계없이 진행되었는데 본인은 지지한 사실이 없습니다. 6-7개월 후에 법제화가 된 일이 있습니다.
4. 1980년 5월 - 5.18 사건 당시 역할
가. 5월 17일 전군지휘관 회의 시 저는 <계엄하에서 학생 데모가 심하고 재야 정치권이 정국을 혼란시키는 행위를 군 지휘관들이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적인 발언을 한 것이고 집권계획 같은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나. 5.17일 예하 여단 모두를 예하 부대에 작전 배속시킨 후 19일까지 3일간 사령부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그때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과 대화를 하던 중, "국군이 국민을 향하여 발포를 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시민이 희생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는 대화를 한 일이 있으며 김 소령은 이 대화 내용을 사령부에 보고하였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해준 사실이 있습니다.
다. 5월 23일, 허삼수 대령이 27일 도청 탈환 작전을 3-4일 앞당기자는 전화를 하였으나 시민의 희생이 클 것을 예상하여 허삼수 대령의 제안을 반대하고 광주에서 계획한 대로 내버려 두라고 조언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라. 5월 26일 밤 8시 비바람으로 헬기 비행이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민의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주로 출발한 사실이 있습니다.
5. 1980년 6월 - 5.31 국보위 설립 참여 정황
본인은 광주 사건이 매듭지어지고 5월 31일 국보위가 설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국보위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5월 31일 당일 임명장을 받으러 가서 국보위가 무엇하는 것이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 사실이 있습니다.
6. 1980년 7월 - 보안사령관 보직 관련 노태우 장군과의 갈등
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본인에게 후임 보안사령관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노태우 장군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본인은 오로지 순수한 군인이기를 원해서 정보 업무를 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노태우 장군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나. 노태우 장군이 제거하려던 김복동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영전시킨 일과 전 대통령이 취임 날 저녁 본인의 집을 방문한 일로 본인은 노태우 장군으로부터 매시간 동향을 감시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 노태우 장군과는 친구이지만 경쟁관계였던 본인은 1988년 광주청문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3당 합당을 도모할 당시 본인을 5.18 광주사건의 책임자로 조작한 이후 1996년 재판에서 처벌을 받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국민들은 특전사령관이던 본인이 5.18의 책임자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라. 1988년 광주청문회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김충립씨가 저에게 내용증명서 편지를 보내오고 자신이 증인을 서기 위하여 귀국하겠다는 제안을 해왔으나 그 당시 이미 각본에 의해 본인을 책임자로 규정하였기에 증인 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 1996년도 구속되기 직전에 김충립씨가 국제전화를 해서 <이번에는 바로 진술해야 합니다. 마지막이니 진실을 말하세요. 제가 증인으로 나가겠습니다> 하고 통화하였다고 하지만 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7. 1980년 8월 초 - 고건 교통부 장관 입각 추천
가. 제5공화국 내각 인선을 하는데 전라도 출신이 한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전두환 대통령 예정자에게 <장관 중 3-4명은 전라도 출신 인사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더니 전 장군이 추천을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나. 김충립 소령에게 좋은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였더니 최영철, 이도선, 고건씨 등을 추천하였는데 고건 수석만 입각시키겠다는 연락을 받은 후 김윤환, 조내벽 회장(고건 수석과 경기고 동기), 김충립과 고건 수석을 만난 후, 건설부 장관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들었으나 구체적인 사항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 그런데 고 장관은 입각 후, 업무추진 과정에서 <호남 출신이고 정호용 장군이 추천하여 입각한 자>라는 이유로 허화평과 허삼수로부터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아서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이유를 김충립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으며 이 사실은 조내벽 회장도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고 장관으로부터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8. 1980년 8월 말 - 대통령 임기 6년을 7년으로 조작한 사건
가. 국보위에서 헌법 통과 시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하는 안이 통과되었고 내부적으로 공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언론에 7년으로 발표가 되는 해프닝이 벌어져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보안반장이 거론하며 사령부에 보고하여 시정을 하도록 보고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 본인은 이 보고를 받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6년도 감지덕지해야지. 1년을 더 하겠다니 한심한 일이다> 하면서 <핵심 참모들이 장난을 한 것이고 전 장군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김 소령에게 <모른 체하고 시정하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5공 집권 비리이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특전사령관 시절의 정호용 전 사령관. |
ⓒ 김충립 전 보안반장 제공 |
가. 보안반장 김충립 소령은 1979년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 특별 지시로 특전사 보안반장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본인의 정보보좌관 임무를 수행한 것은 1980년 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특전사에 방문하여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나. 이때 김 소령이 사령관에게 <이 지시를 보안사 내부 핵심인사들에게 공고해 주십시오. 후일에 반역자로 몰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전 장군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 7월, 전 장군이 보안사령관직을 떠나고 노태우 사령관이 부임하자 김 소령은 <변절자>라는 오해를 받았고 허씨들의 미움을 받아 난처해졌고 저는 매시간 동향 보고를 하는 <밀착 감시자>로 되었다는 이야기를 후일에 김 소령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다. 1980년 10월 25일(토) 보안사에서 1981년도 중령 예정자 진급 심사가 끝나고 김충립 소령이 중령 진급 예정자 발표가 있었고 김윤환, 조내벽, 본인이 진급 축하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라. 다음 날인 10월 26일(일) 저와 노태우 보안사령관과 골프를 치게 되었는데,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김 소령이 진급은 되었으나 신원에 문제가 있어 군 생활을 더 계속할 수 없다. 허삼수와 사이가 나쁜 것 같다. 내일 아침에 나에게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마. 10월 27일(월) 김 소령이 노태우 사령관과 안병호 비서실장을 만나고 돌아와서 김 소령은 <본인에게 신원에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역서를 쓰라고 하기에 이것은 부당하고 불법입니다. 전역서를 못 쓰겠습니다>라고 항변하였더니 안병호 비서실장이 <그러면 서빙고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서빙고에 가서 <간첩으로 몰려 죽기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역서를 쓰고 왔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바.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이후 군부대에 출입을 금한다. 군부대를 출입하면 구속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정 장군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 소령을 예편 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사. 본인이 정당 창당을 주도하는 권정달 대령에게 김충립 소령을 기용해 쓰라고 수차 전화를 한 일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하여 김 소령은 청와대 허삼수가 지휘하는 청와대 특수수사대에 연행되어 10일간 불법 감금되어 조사를 받고 미국으로 피신 유학을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김 소령의 강제 예편 사건 이면에는 김 소령이 본인과 가깝기 때문에 김 소령을 군에서 제거했다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당시, 여건상 본인이 김 소령을 지켜 줄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김 소령은 1979년부터 허삼수 대령의 미움을 샀고, 12.12 사건과 창당 모금, 언론통폐합 반대, 5.18 당시 비판적 언동 등으로 강제 예편을 당한 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상과 같이 추가로 진술서를 제출하오니 진실을 규명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1. 3. 3.
진정인 정호용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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