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나라 발해의 역사를 되살린 유득공

김삼웅 2024. 1. 2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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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65] 유득공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는 1784년 봄에 완성되었다. 그가 직접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다녀온 지 6년 만이었다. 발해인들처럼 대륙을 누비던 시원스런 걸음과, 중국과 조선에 남아 있는 모든 기록들,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뜨거운 마음까지 담은 책이다. 그의 작업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격려하던 박제가가 쓴 서문도 앞에 실렸다.

"나의 벗 혜풍(惠風) 유득공은 박학하며 시를 잘 한다. 옛 문물제도에 조예가 깊어 <이십일도 회고시>를 편찬하여 우리나라에서 탐방할 만한 곳을 상세하게 서술한 바 있다. 또 관심을 확대하며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모든 것을 조목조목 빠짐없이 서술하였는데 내용이 볼만하다." (이덕무, <이목구심서>)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이 698년 만주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여 228년 동안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허삼위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다가 926년 거란에 멸망되고 그 유민 다수가 고려에 귀부하였다.

당당한 우리 고대사의 큰 줄기인 데도 발해를 고려와 조선시대에 거의 외면되고, 잊혀지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득공이 안타까워한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사라진 옛 영토만이 아니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는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도 잡는다는 말이 있건만, 그 핏줄이 흐르고 있을 우리 조선 사람들은 발해인을 몰랐다. 드넓은 대륙을 누비던 씩씩한 기상도 잃어버리고, 어느새 우리는 큰 나라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었다. 제 역사를 간직하지 못한 채 무심히 흘려보낸 천 년의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아버지 유춘과 어머니 남양 홍씨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혜풍, 호는 영재(泠齋)이다. 서얼 출신인 데다 5살 때 아버지가 27살을 일기로 요절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몸까지 약하여 병을 자주 앓았다. 7살 때 어머니와 무반가문인 남양의 외가로 이사하였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이 외숙들의 활쏘기·매사냥을 하며 지내는 것을 보고 10살 되던 해에 서울로 옮겨, 삵바느질로 아들의 교육에 정성을 들였다. 영민했던 그는 공부에 심혈을 기울이고, 성장하면서 이웃의 '북학파' 인사들,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과 어울렸다. 대개 서얼 출신의 비슷한 처지였다.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틈틈이 개성·부여·공주 등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지었다.

27살 때인 1774년 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하면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재능이 있는 서얼출신들의 처지를 이해한 군왕 정조는 1779년 6월 유득공을 검서관에 임명했다. 규장각 내의 각종 서책을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같은 처지의 이덕무·박제가 등과 함께였다.

고루한 골품제의 사슬에 묶여있던 우수한 인재들이 한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정조가 있었기에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북학파가 형성되고, 유득공도 그 대열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검서관을 그만두고 37살 때인 1784년 포천현감으로 지방관의 역할을 맡는다. 이 해에 그동안 준비한 <발해고>를 저술하였다.
그는 역사가이기 전에 탁월한 문인이었다. 옛 도읍지를 탐방하면서 쓴 <해부루를 기억하면서>이다.

대동강은 자욱한 안개 속에 잠겼고
봄날의 왕검성은 그림 같다
머나먼 도산에서 조회를 하였으니
아이들은 아직도 해부루를 기억한다.

대동강과 평양성을 둘러보면서 쓴 시다.

십구 년 동안 활과 화살을 들고 누비더니
기린마를 타고 조천석을 떠나갔네
천 년 동안의 패기는 물보다 차가운데
무덤 속에는 백옥 채찍이 삭는다.

유득공이 수많은 유학자 중에 유별난 것은 유생들이 거의 거들 떠 보지 않던 발해사를 연구한 때문이다.

그가 이 책을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검서관으로서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은 많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 있다. 그러나 그가 북방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박제가가 서문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유득공이 <이십일도 회고시>를 쓸 적에는 한반도 안의 역사에만 국한되었었고, 여기서 나아가 한반도 밖으로 시야가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발해고>이다. 그의 나이 31세에서 37세 사이에 의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심양을 잠시 다녀왔던 경험도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송기호, <유득공>)

유득공은 사학자·문인의 영역 뿐만 아니라 '인간승리'의 인물이기도 했다. 서얼의 신분제약 이라는 지극히 불우한 처지에서 검서관을 시작으로 20여 년 간 관직생활을 하고, 만년에는 정3품이라는 청요직에까지 올랐다.

그는 <삼국사기>·<고려사> 등 한국사료와 <구당서>, <신당서> 등 17종의 중국 사료를 참고·연구하여 최초의 발해사 연구서를 지었다.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 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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