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6)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면 부모님 만날 수 있을 텐데…

임보혁 2024. 1.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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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북진해온 남한 국군은 집이 있던 은율읍사무소 소재지에 '서해지구 방위사령부'를 만들었다.

당시 고향 인근 구월산에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한 일부 인민군들이 숨어 있었는데 밤이 되면 먹을거리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기에 그들과 싸우는 것이 주 임무였다.

당시 2~3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올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부모님과 떨어지게 됐다.

그때만 해도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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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잔당들을 막기 위해 국군이 만든
‘서해지구 방위사령부’ 차출돼 보초 근무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함경남도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이른바 '흥남철수작전' 당시 모습. 현봉학박사기념사업회 제공


그렇게 북진해온 남한 국군은 집이 있던 은율읍사무소 소재지에 ‘서해지구 방위사령부’를 만들었다. 당시 고향 인근 구월산에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한 일부 인민군들이 숨어 있었는데 밤이 되면 먹을거리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왔기에 그들과 싸우는 것이 주 임무였다. 국군은 가정마다 남자 한 명씩 차출했다. 그나마 키가 컸던 내가 차출돼 보초 업무를 맡았다. 보초를 서던 그 일대는 하루가 멀다고 폭격 소리로 가득했다. 하늘에서 ‘드르륵’ ‘드르륵’ 하는 총소리라도 들릴 때면 몸을 숨기기 바빴다. 지붕 위로 쏟아지듯 들리는 기관총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군복이랄 것도 따로 없었기에 인민군복을 입고 남겨진 인민군들과 싸웠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자에 써진 이름표 색깔뿐이었다.

2개월쯤 지났을까. 12월 초쯤이었다. 밤이 되면 저 멀리 평양 방향 북쪽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췄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북쪽에서 인민군이 중국 중공군과 함께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부대는 당시 큰아버지 가족이 살고 계셨던 인근 서해의 조그마한 항구 ‘허새’로 일단 퇴각했다.

마을 자치대 수준에 불과했던 부대라 무기도 변변치 않았기에 중공군이 몰려온다는 육지로는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2~3일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올 수 있었던 나는 그렇게 부모님과 떨어지게 됐다. 그때만 해도 유엔군이 다시 북진하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1년 1월 21일쯤으로 기억한다. 웅녕이라 불리던 작은 섬으로 간 우리는 조금 더 큰 인근 섬인 초도로 넘어가게 됐다. 초도로 가기 위해 작은 어선을 탔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탔는지 간신히 물에 뜰 정도였다. 침몰의 두려움 끝에 순풍을 타고 무사히 초도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초도에 머문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곳에 정박한 미군의 대형 군함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난 영화 ‘국제시장’(2014)에 나온 전차상륙함(LST) 같은 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앉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비좁은 배에 몸을 웅크린 채 밤새 배를 타고 가니 어느 순간 배에 있던 국군이 젊은이들만 골라 갑판 위로 올려보냈다. 그렇게 백령도 진촌의 작은 항구에 내렸다. 남한 땅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를 태운 배는 군산과 목포, 부산 등에 사람들을 차례대로 내려줬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그려진 ‘흥남철수작전’과 다름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재밌는 인연도 하나 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북한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을 군함에 태워달라며 미 10군단장에게 요청한 현봉학(1922~2007)씨가 계신다.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그분은 훗날 내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교회 장로님으로 계셨다. 훗날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기념 휴게소를 발견하고는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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