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재판 지연을 구원하리니…"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정년 앞둔 老법관의 정책제언 따라잡기
천 처장에 앞서 지난해 연말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정년 법관의 정책제언’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AI 판결 이유 작성 도우미 도입이다. 대법원이 이를 전격 수용한 셈이어서 눈길을 끈다. 강 판사는 이달 말 36년의 판사 생활을 마친다. 하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저술과 유튜브, 강연 활동을 하며 AI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노 법관의 공직생활 끝자락을 동행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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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대엽 행정처장, 재판지연 해결 위해 "AI 도우미 도입" 발표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정책제언' 법원이 전격 수용
"법관 당 연구관 3~5명 지원 효과…판결문 공개가 전제조건"
이달 말 퇴임 … "디지털 디바이스 해결 위해 노력할 계획"
」
136만 뷰 찍었던 무대에서 고별 강연
지난 18일 부산엔 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강 판사는 오후 3시부터 부산지법 강당에서 ‘AI 시대의 생존 자세’를 주제로 강연했다. 공직자로서 마지막 외부 일정이다.
사실 이곳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2015년부터 2년간 부산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2017년 1월, 임기를 마치고 떠나며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라는 주제로 고별강연을 했다. 이 영상을 갈무리해 유튜브에 올린 게 대박이 났다. 2주 만에 조회 수가 100만을 넘었고 지금까지 총 136만 뷰를 기록했다. 이전부터 법원 내 IT 전문가로 통하던 그는 이 동영상을 계기로 법원 외부에서도 강연 요청이 쇄도하는 파워 인플루언서가 됐다. 사실상 전국구 스타로 처음 데뷔한 곳을 고별 무대로 잡은 셈이다.
강연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미러링 한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며 시작했다. 챗 GPT와 구글 바드 어플을 다운받고, MS 빙의 코파일럿과 네이버 클로바X 첫 화면을 바탕화면으로 끌어오는 과정을 시연하자 청중들도 부지런히 따라했다. 현존하는 ‘AI 4대장’을 장착한 것만으로도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강 판사가 AI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법관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묻고, 학교폭력 피해자 고소장을 쓰게 했다. 그는 이 과정을 “AI를 고문한다”고 했지만, AI는 무던하고 성실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 신속성과 정확성에 ‘와~’하는 감탄과 박수가 어우러지며 예정했던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AI가 불러올 재판의 미래
부산 강연 하루 전, 강 판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고법 15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ㄱ자로 놓인 책상을 둘러싸듯 놓인 모니터 4개와 노트북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한쪽 구석엔 외장 하드 4개를 꽂을 수 있는 인클로저도 보였다. 현재 꽂힌 것만 40테라바이트 용량이었다.
‘정년 법관의 정책제언’은 그가 평소 ‘디지털 상록수’와 ‘송백일기’라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해오던 주장을 지난해 말 12개의 시리즈로 정리한 것이다. 이중 법원 시스템에 관한 부분은 크게 ▶판결문 작성 AI 도입 ▶디스커버리 제도·중재원 도입 ▶판결문 전면 공개 ▶지방 순환 근무 폐지를 포함한 인사제도 개편 등 4가지. 가장 관심이 가는 AI 도입 문제부터 물었다.
-AI가 법관을 어떻게 지원한다는 건가.
“결론을 AI가 내리는 것은 아니고, 판결 이유 작성을 보조하는 것이다. 주장을 요약하고 판례·법령·법리 중 가장 알맞은 것을 순식간에 찾아주면, 판사가 마치 레고 블록으로 자동차 조립하듯 판결문에 끼워 넣을 수 있다.”
-재판지연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법관마다 3~5명의 재판 연구원이 24시간 대기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다. 지금 판사 한 명이 주 3건의 판결문을 쓴다면 AI의 도움을 받으면 5~8건을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이 AI가 제시한 허위 판례를 법원에 냈다가 들통나는 등 법률 AI의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초기 AI들은 학습된 정보가 없을 경우 전후 맥락을 분석해 가장 근사치의 답을 추론해 제시하도록 설계됐다. 처음부터 몰라도 아는 것처럼 '뻥'을 치라고 주문한 것이다. 여기서 환각, 즉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오류 가능성을 알고 사용자가 걸러내야 하는데, 코언은 이를 몰랐던 것 같다.”
-AI가 내놓는 답변의 진위를 사용자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결국 업무부담은 그대로일 것 같다.
“이런 오류는 AI 기술 발전과 피드백 등에 의해 걸러지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특히 ‘렉시스+AI’나 ‘웨스트로프리시전’ 같은 법조 전문 버티컬 AI는 범용 AI와 달리 법률 부문의 데이터만 깊게 학습하기 때문에 오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드루킹이나 댓글조작 사건처럼 외부에서 작정하고 왜곡된 정보를 학습시키면 오류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그래서 법원에서 쓸 AI는 폐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일단 개발되고 나면 외부 데이터 입력을 차단하고 법원 내부의 광범위하지만 검증된 자료로만 학습시킨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잠자는 백설공주는 누가 깨울까
강 판사는 기술적 설명을 하면서 몇 차례 시연을 해 보였다. 구글 바드는 판례와 법리를 찾아달라는 명령에 답을 내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액 사건 판결문은 지금의 범용 AI도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실제 5000만원 짜리 대여금 채권을 요청하는 사건 정황을 제시하자 AI는 정확하게 양식에 맞춘 판결문을 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만찬 자리에서도 이걸 보여줬다. 조 대법원장은 “심의관 10명보다 낫다”고 평했다고 한다. 천 행정처장이 AI 도우미 도입을 발표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깔렸다.
그는 전제 조건으로 판결문 완전 공개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법관들이 법률과 판례, 실무 논문들을 기초로 작성한 엄청난 양의 판결문이 ‘AI 학습의 보고’라는 것이다. 또 처음엔 법원이 직접 개발하지만, 결국 민간이 경쟁해 좋은 AI를 만들고 법원은 그걸 수용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다. 이게 가능하려면 민간이 판결문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판결문 공개를 “잠자는 백설 공주를 깨우는 것”에 비유했다.
법원은 지금도 판결문을 공개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실제 공개되는 판결문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게다가 엄격한 익명처리 때문에 판결문이 아닌 암호문 같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를 개선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했다고 한다. 법률 개정안까지 다 준비했지만 지난 6년간 묻혀버렸다. 결국 누가 백설 공주를 깨울 수 있을지가 관건인 셈이다.
호기심 많은 ‘정통 법관’의 업보
강 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IT 전문가지만, 그렇게만 규정되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일반 사건을 남들보다 더 많이 처리한 '정통법관'이라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열어 자신이 판결한 사건 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36년 동안 그의 이름이 들어간 판결문(신청 사건 제외)은 총 1만201건. 연수나 법원장으로 재판을 직접 하지 않은 시간을 제외하면 연간 350건 이상 판결한 셈이다.
그는 전임 재판부가 2~3년, 혹은 5년 넘게 끌어온 장기미제 사건을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구로공단 농민 토지수용 손실보상금 사건, 4대강 사업 허가 취소 사건, 혈우병 관련 에이즈 감염 사건, 기저귀 특허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판사가 평생 1만건 넘는 판결을 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보통 판사생활 30년을 넘기면 고등법원장이 되고, 이후엔 원로법관으로 나가 판결할 기회 자체가 줄기 때문이다.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강 판사는 사법 농단 사건을 검찰에 넘기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고등법원장 임명에서 배제됐다. 당시 사표 쓸 결심도 했는데 아내의 만류로 접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다시 재판을 하면서 1만 건을 넘겼다. 또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등진 윤성근 부장판사를 기리는 책 권과 자신의 법관 생활을 총정리한 9권 등 총 12권의 전자책을 출간했다. 전체 분량은 9455쪽에 이른다. 그는 "디지털 정약용이 된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완성했다"고 했다.
그는 퇴임 후 변호사 활동과 함께 연구소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디지털 디바이드(양극화) 해소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IT 얘기다. “IT 전문법관이라는 별칭은 나 스스로 IT에 관심이 많고, 그걸 감추지 않은 업보”라며 웃는 모습이 허허로웠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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