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에이×”의 기억 [김선걸 칼럼]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5월 29일이었다.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가 유세차 부산에 내려갔다. 각 언론사 담당기자(마크맨)들도 같이 갔다. 필자도 있었다.
부산역 앞 광장이었다. 노 후보는 격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일이 터졌다. 한 신문사에서 노 후보가 연설 중 ‘에이썅’이라는 막말을 했다고 큼지막하게 보도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10여명의 기자들이 귀를 쫑긋하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
문제의 연설은 이랬다. “경마장이 진해 쪽으로 넘어간다는 거 아닙니까? 그거 안 넘어가게 붙들려면 (안상영 부산시장과) 손발을 맞춰야 되겠는데 ‘×××’ 배짱 쑥 내고….”
노 후보가 ‘안 시장 배짱 쑥 내고’라고 한 것을 그 기자는 ‘에이썅 배짱 쑥 내고’로 들은 것이다.
결국 녹음을 들어보기로 했다. 천호선 부대변인이 카세트를 들고 와서 녹음을 틀었다. 11명의 기자 중 8명이 ‘안 시장’으로, 기사를 쓴 기자를 포함해 3명은 ‘아이썅’으로 들린다고 했다. 당시 현장 기자 중에는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김의겸 기자도 있었고 후에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또 다른 언론사 기자도 있었다. 서로 알 만한 사이였지만 ‘에이썅’을 고집하는 기자를 타 회사 기자들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각자 판단하기로 했다. 해당 신문은 끝까지 기사를 고치지 않았다.
‘아이썅’이라고 들린다던 나머지 기자들도 나중에는 ‘안 시장’을 인정한 것으로 기억한다. 결정적으로 노 후보 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말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제3자가 윽박지를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한 명의 기자 귀에는 끝까지 다르게 들린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그때 생각했다.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 사람 귀에는 그 말로 들리는 게 사람이구나.’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날리면’ ‘바이든’ 논란에 대해 며칠 전 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MBC의 보도가 잘못됐으므로 정정 보도를 하라는 결정이다.
이게 사법부의 판결까지 갈 사안인가 싶다. 전문가도 ‘감청 불가’ 판정을 내렸다니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그건 각자가 판단하면 될 일이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한 일을 팩트라고 언론이 보도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소모적인 공방의 판이 깔리고 정작 관심받아야 할 이슈는 멀어진다.
2002년 당시 노 후보가 외쳤던 영남 지역 공약은 ‘막말 보도’가 다 삼켜버렸다. 노 후보는 막말 논란보다 부산 시민에게 한 얘기가 언론에서 사라져 더 마음 상해했다고 들었다. 윤 대통령의 경우도 당시 전기차 보조금 문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복잡한 현안이 많았다. 이것들은 다 묻혀버렸다.
요즘 정치권의 오고가는 말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다. 총선이 석 달 남았으니 더 심해질 것이다.
‘암컷들 설치고’나 ‘정치 쓰레기’ 같은 발언은 물론이고 욕설인 ‘××’ 등도 흔히 쓰인다. 테러당한 정치인에게 ‘칼빵’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 다했다.
막말을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막말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을 통해 왜곡되거나 확대 재생산된다.
정치를 한마디로 하자면 ‘말’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말로 생각을 나타내고, 말로 사상을 정립하며, 말로 국민을 설득한다. 그런데 막말 정치인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권자들을 호도하려는 것이다. 국민들이 균형 잡힌 생각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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