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에서 '김대중' 외치던 시절, 이 영화에 답이 있다
[서부원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 이미지 |
ⓒ 명필름 |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현대사 교과서'라고 해야 할 성싶다. 지난 10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이야기다. 주인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지만, 해방 전후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의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시공간적 배경 삼고 있어서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3김 분열'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 세월호 참사, 촛불 혁명까지 짤막하게 소개돼 있긴 하지만, 시험에는 거의 출제되지 않아 '부록'처럼 여긴다. 아이들의 역사 공부는 영화에서처럼 6월 민주항쟁에서 대개 마무리된다.
영화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빠짐없이 언급된다. 공교롭게도 김대중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와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교과서에 밑줄 그어가며 암기하는 사건들이다. 무미건조한 교과서의 서술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더없이 유용한 참고서가 될 듯하다.
▲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스틸 이미지 |
ⓒ 명필름 |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라고 보느냐?"
현대사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화두 삼아 아이들에게 건네는 질문이다. 예상대로 서너 명으로 압축이 될뿐더러 순위마저 대동소이하다. 해방 이후로 한정해서인지, 백범 김구 선생이 순위 내에 들지 못하고, 생뚱맞게 윤석열 대통령을 꼽는 장난기 섞인 답변도 더러 나온다.
주저 없이 1위는 박정희, 2위는 이승만, 3위는 전두환, 그리고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린 뒤 김대중이 언급된다. 드물게 노무현과 김일성이 등장하지만, 조롱 반 놀람 반의 웃음을 자아내는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일베 등의 극우 유튜브가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방증이다.
기성세대에 물어도 별반 다르지 않은 답변이 나올 것이라 본다. 당대 권력자의 이름으로 시대를 규정하고, 그것이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는 이승만 정부에서 잠깐의 장면 총리 집권 시기를 지나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의 오랜 군사독재정권을 거쳤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 12년에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군사독재정권만 무려 30년이다. 현 윤석열 대통령 임기를 제외하면, 문민정부 이후의 기간을 모두 합해야 채 30년이 못 된다. 이럴진대, 우리 현대사에서 독재자의 이름부터 우선 떠올리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대번 순위를 달리 매기게 될 것이다. 부동의 1~3위인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의 시대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인물이 김대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그는 6.25 전쟁 중 발췌개헌을 시도한 이승만의 작태를 보고 정치에 뛰어들었고, 3선 개헌을 획책한 박정희에 맞서며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광주 학살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세계적인 인물로 우뚝 섰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독재자들의 만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동시대를 산 주변인들은 그가 독재 권력에 눈엣가시였음을 증언한다. 독재자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안달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민주주의만 외쳤다.
이승만 정권 당시 평화통일을 주창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그랬듯,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은 권력의 위기 때마다 정적들을 '빨갱이'로 내몰았다. '빨갱이'여서 죽인 게 아니라, 죽이고 나서 '빨갱이'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을 권력 유지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아직도 그를 '빨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에겐 적잖은 충격을 줄 듯하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전두환의 신군부가 덧씌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들은 광주 학살을 지역감정 탓으로 돌린 채, 당시 투옥 중이던 김대중이 배후 조종했다며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했다.
6.25 전쟁 당시 우익 인사로 몰려 공산당에게 처형당할 뻔했던 그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음에도 전두환 정권은 막무가내였다. 이른바 '땡전 뉴스'를 앞다퉈 내보낸 언론들도 정권에 부역했다. 그렇게 김대중은 '빨갱이'로 규정됐고, 5.18 당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던 광주시민도 덩달아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했는데, 왜 관중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외칠까?"
오래전 야구광인 한 지인의 당혹스러웠던 이 질문에 이젠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테다. 신군부의 총칼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던 당시 광주와 호남 사람들에게 야구장은 유일한 '해원의 굿판'이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스틸 이미지 |
ⓒ 명필름 |
영화는 6월 민주항쟁 직후 김대중이 5.18 망월 묘역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끝이 난다. 묘역에서 김대중이 아내 이희호 여사와 함께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에선, 순간 나이 지긋한 관객들 모두가 함께 울었다.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자책의 눈물과 연민이야말로 정치인의 첫 번째 덕목임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사건에 중점을 두고 보면 최고의 '현대사 교과서'지만,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주목하면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로 손색이 없다. 영화 속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갖추라"는 일갈은 기실 그의 인생사에서 길어 올려진 정치 철학이다.
코앞의 총선 대비에 여념이 없으실 테지만, 윤석열 대통령도 짬을 내 꼭 봤으면 싶은 영화다. 국내외 정세와 시대적 환경이 다르다 해도,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덕목이 다를 리는 없다. 냉전과 군사독재라는 엄혹한 정치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정치인 김대중의 삶을 부디 정면교사 삼았으면 좋겠다.
사족. 영화 속 김대중과 함께 눈물을 훔쳤던 어르신들이 영화관을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동네에선 상영을 막을지도 모르겠네." 전국에서 동시 개봉됐다고 해도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지금도 타지로 여행할 때 호남 사람임을 감추기 위해 사투리도 조심한다고 했다.
군사독재정권과 부역 언론이 조작해낸 '빨갱이' 낙인의 공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셈이다. 가해자들은 사과는커녕 여전히 기세등등한데 되레 피해자들이 주눅이 들어 움츠린 형국이다. 누구든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이 현실을 절감한다면, 이 영화를 필히 관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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