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파동의 아흔 살 주택, 킷테
숙명여대 후문이 있는 청파동 한 골목, 1930년부터 9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택이 있다. 짙은 상아색에 손으로 빚은 듯한 울퉁불퉁한 표면, 그 위에 얹힌 뾰족한 박공지붕. 그림책에나 등장할 법한 외관이지만 그 속은 또 다른 면모를 지녔다. 천장과 바닥, 기둥을 이루는 고재를 비롯해 ‘도코노마’ ‘다다미’ 같은 일본식 건축 요소가 있는 전통 일식 가옥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곳은 1930년 경성에서 건축 회사를 운영하던 일본인이 지은 주택으로 해방 후 민간인에게 불하됐다가 1960년에 한 가족의 터전이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누군가의 외갓집이었으나 2017년 집의 새로운 쓰임새를 모색할 시점이 찾아왔다. 건축주의 가족은 상의 끝에 카페로 활용할 것을 결정했다. 증조모부터 증손자까지 무려 5대의 추억이 쌓인 곳이기에 과도한 변형은 지양했다.
이런 히스토리를 가진 고택을 리모델링하는 임무는 에이코랩(a.co.lab) 정이삭 건축가에게 주어졌다. 그는 유독 신중한 태도로 접근했다. 켜켜이 쌓인 것은 사람의 시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관이나 구조체는 그대로이나 거주자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형되면서 집은 생활사적 가치를 품게 됐다. 이에 구조 보강부터 시작해 기존의 가치를 유지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특정 시대에 치우치거나 건축가의 스타일을 드러내지 않고, 집이 오랜 기간 쌓아온 고유한 특징을 존중하는 과정이 따랐다. 그렇게 1세기에 가깝게 높은 담으로 둘러싸였던 집은 지난해 ‘킷테’라는 이름의 카페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정이삭 건축가를 만나 집의 시간을 매만진 과정을 들었다.
Q : 집의 형태가 독특하다. 건축가로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A : 보자마자 호기심이 들었다. 언뜻 봐선 시대와 양식을 특정하기 어려웠는데, 공사 과정에서 그런 의문이 하나씩 풀렸다. 외관은 서양식이지만 내부는 전통 일식 목구조이고, 응접실과 실내 테라스, 벽과 바닥의 타일 같은 서구의 건축 요소가 있는 화양절충식 주택이다. 여기에 한국 기후에 적응한 흔적이 남아 있는, 보기 드문 유형이다. 엄밀히 말해 한반도 화양절충식 주택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Q : 다른 리모델링 작업과 차이점이 있다면
A : 난이도와 시간. 리모델링의 출발은 기존 것에 대한 이해인데, 이해에 투입된 시간이 가장 많았던 프로젝트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고친다는 생각에 목구조 전문가 등과 긴밀하게 협업했다. 결과적으로 풍부한 아카이브가 쌓여 이곳만의 매력을 한층 높였다고 생각한다.
Q : 공사 중 1층 바닥에서 의미 있는 흔적을 발견했다고
A : 난방 방식의 변천 과정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방 한 칸만 구들 난방식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다다미였다. 한국의 겨울에 적합하지 않은 다다미 대신 연탄 난방을 위한 구들장을 깔고, 다시 그 위에 기름 보일러 사용을 위한 동파이프 배관을 설치했다. 그 레이어가 남아 있더라.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 집의 ‘성장테’ 같았다. 이를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벽체 단면에 흔적을 남기고, 옛 다다미 형상을 따라 바닥을 목재로 마감했다.
Q : 창살과 고창의 장식적 요소도 눈에 띈다. 이 또한 복원의 결과인가
A : 일부 깨지고 부서져 있어 전문가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이 외에도 문 손잡이나 잠금장치 등 완성도 높은 하드웨어는 수리하거나 유사한 형태로 다시 제작했다. 리모델링의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업의 주안점이었다.
Q : 한국, 일본,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재된 집이다. 이러한 경우 복원 지점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A : 많은 복원 작업의 경우 대상이 만들어진 최초의 시기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진 시기가 꼭 정답일까. 이곳을 그렇게 다뤘다면 집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진화해 온 과정을 원점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물론 무분별한 훼손으로 본래 가치를 잃은 부분은 선별해야겠지만. 여기에 건축물이 존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Q : 리모델링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 아카이빙 전시를 선보였다
A : 집의 성장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은 청파동 고택이 갖는 또 다른 가치다. 집이 인간과 교감해 온 시간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변화 과정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변화의 흔적을 탐색할 수 없는 도시는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그러한 점에서 이번 작업이 의미 있는 기점이 되기를 바란다.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