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한 러 대사 "북·러 무기거래? 익명의 사진이 뭔 증거냐"
"익명의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찍은 사진은 충실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전의 수단은 될 수 있죠."
지난 4일 부임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신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 19일 서울 중구 주한러시아대사관에서 이뤄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ㆍ러 무기 거래와 관련해 앞서 한·미 당국이 제시한 정황 증거들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북한과의 불법 무기 거래 사실에 선을 그은 그는 이 문제를 "전문성을 가진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자"고 주장했다. 인터뷰는 유지혜 외교안보부장이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러시아는 지난해 3월 대러 제재를 가한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부임 전 한국에 대해 "비우호국 중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로 표현했다. 현재 양국 관계를 어떻게 보나.
A : 서방의 많은 정치인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 '러시아에 벌을 줘야 한다'고 말했지만 한국은 그러지 않았다. 한국은 현 지정학적 상황을 여타 비우호국들과는 달리 바라보는 것 같다. 한국은 장기적으로 러시아를 강한 이웃이자 좋은 친구로 두고 싶어한다. 한국이 러시아의 비우호국 중 우호국으로 되돌아가는 첫 사례가 되길 희망한다. 한ㆍ러 관계는 아직 건설적이다.
Q : 한국인들은 북ㆍ러 무기 거래가 한반도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걱정하고 있다.
A : 러시아를 향한 지적엔 근거가 없다. 부디 '증거물'을 '전문 기관'에 제출해 그 안에서 전문적으로 토론하길 바란다. 제재 이행을 감시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1718 위원회)에선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익명의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찍은 사진은 사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증거물이 될 수 없다. 선전 수단이 될 뿐이다. 러시아는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으로 안보리 결의 전부를 준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 백악관은 북ㆍ러 간에 선박을 이용한 컨테이너 1000개 분량의 무기 거래가 이뤄졌다며 관련 위성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한국 국방부도 "포탄 수십만 발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달 초에도 미국은 북한이 러시아에 탄도미사일을 제공했다고 밝혔고, 우크라이나는 북한산으로 추정되는 미사일 잔해를 공개했다. 이에 대해 지노비예프 수집 절차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아 증거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다만 지노비예프 대사가 언급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서 북ㆍ러 무기 거래 의혹을 처음 언급했지만 "계속 조사하겠다"며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최근 위원회 안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조정관과 중국, 러시아 출신 조정관 사이에 의견 대립이 극명해 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다고 한다.
한편 북한은 21일에도 관영 매체를 통해 최선희 외무상의 최근 방러 결과를 전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빠른 시일 내에 방북하겠다는 용의를 표명했다. 최상최대의 성심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도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이날 "러시아는 국제적 의무를 다하면서 우리의 우호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관계를 다방면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Q : 주장한 대로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라면, 앞으로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되나.
A : 가정적 상황에 대해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러시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처음 서명한 5대 핵보유국(P5) 중 하나로서 해당 조약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Q :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쏠 경우 자동으로 대북 유류 반입을 추가로 제한하는 '트리거(trigger·방아쇠)' 조항은 2017년 러시아도 찬성해 마련됐지만, 지금은 무력화됐다. 러시아의 입장이 과거와 달라진 것 아닌가.
A : 대북 압박을 강화해도 한반도 문제 해결엔 도움이 안 된다. 코로나19로 인해 북한은 지난 3년간 그 어떤 제재도 능가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봉쇄했지만, 무기 개발에 진전을 이뤘다. 이제 한반도에서 근본적·장기적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과연 우리의 목표가 북한의 민간인이 고생하도록 벌을 주는 것인지, 북한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것인지, 한국이 북한을 흡수하는 것인지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안정이다.
Q : 물론 제재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대화를 거부한 채 핵무기를 활용한 남측 점령을 이야기하고 있다.
A : 내가 한반도 가족사에 끼어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정은의 발언은 한국이 더는 통일의 대상이 아니고 별도의 국가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실제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남북한 모두와 수교하고 있지 않나.
Q : 국제적으로 남북은 동등한 유엔 가입국이지만, 남북 간에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를 유지해왔는데 김정은이 이를 부정하기 때문에 충격적인 것이다.
A : 위기에서 기회를 보면 좋겠다. 저도 그러려고 하고 있다.(웃음)
Q :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선 한국의 살상 무기 지원을 "한ㆍ러 관계의 레드라인"이라고 말한 적 있다.
A : 맞다. 이는 한국의 무기 지원이 겁나서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더 무서운 일을 많이 겪었다. 한국산 무기가 제공된다고 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뀔 리도 없다. 다만 한국이 그간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러시아에 대한 진정성과 건설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기준이었다. 만약에 한국산 탄약이 러시아인을 죽이는 데 사용된다면 러시아인의 마음이 어떻겠나. 한국의 무기 지원은 인명 피해를 야기하고, 전쟁을 장기화시키며, 평화 안착을 미루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한국이 유럽보다도 더 많은 탄약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는 외신 보도에 대해서도 지노비예프 대사는 "우리는 미국의 보도가 아닌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믿고 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정부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줄곧 "전쟁 중인 국가에는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이날 "어려운 시기에 부임했지만 돌아갈 때는 지금보다 더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외무부에서 제1 아주국장 등을 지낸 '중국통'인 그는 이날 직접 '道路曲折 前途光明'(도로곡절 전도광명)이라는 문구를 한자로 종이에 적으며 한ㆍ러 관계의 앞날과 관련해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미래는 밝다"고 했다. 이어 '危機'(위기)를 적은 뒤 남북 관계 및 한ㆍ러 관계의 장애 요소에 대해서도 "위기에서 기회를 찾자"고 강조했다. "위기의 '기'(機)는 기회라는 단어에도 쓰이는 글자"라면서다.
정리=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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