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비대위원장 찍어낼 수 있나 [총선 79일 앞, 여권 혼돈의 밤 ③]
나서서 사퇴 여론 조성하라는 뜻이지만
압도적 공감대 없인 당만 분열될 수도
자칫하다간 '김건희 특검법' 통과 우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대통령실로부터 사퇴 요구를 전달받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일축했다. 대통령실 또한 한 위원장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기대와 신뢰'가 철회됐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후 전개는 여당 친윤(친윤석열) 의원들이 움직여야 하는데, 압도적 여론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찍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쌍방의 물밑 수습과 출구 모색 가능성도 엿보인다.
한동훈 위원장은 21일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 보도와 관련해 "국민 보고 나선 길, 할 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퇴 요구를 전달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관섭 비서실장이 직접 나서 사퇴 요구를 전달했던 대통령실은 같은날 윤 대통령의 '기대와 신뢰'가 철회됐다는 보도와 관련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 공천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면서도 "비대위원장 거취 문제는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신뢰와 기대'가 철회된 점은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국민의힘 친윤 의원들에게 '알아서 나서라'는 신호를 준 것으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앞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김기현 대표 사퇴 직후 혼란이 이어지던 지난달 14일 국회를 찾은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비대위원장 문제는) 대통령실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라며 "(윤재옥 당대표)권한대행이 당내 중지를 모으지 않겠느냐"고 했었다.
하지만 그 바로 이튿날 열린 의원총회에서 친윤 의원들이 대거 총대를 메고 '한동훈 추대론'에 나섰다. 결국 '용산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쓰고, '친윤 의원들이 나서라'고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는 셈이다.
여권 관계자는 "'물러나라'는 신호를 줬는데 알아서 물러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지금 처음 나온 것이냐"라며 "'연판장 사태' 때처럼 찍어내는 사태까지 감수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찍어내는' 절차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비상대책위원회에 관한 조문은 가장 끝무렵 '보칙'의 제96조부터 나온다. 1개 조 10개 항이 전부로 소략하다. 사퇴 상황을 상정한 조항은 하나 뿐이다. 사퇴 등 궐위가 발생한 경우에는 원내대표·최다선 의원 순으로 직무를 대행한다고 돼있다.
최근 10년 내의 정당사를 살펴봐도 비상대책위원장이 중도 사퇴한 경우는 지난 2014년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 사퇴가 유일한 사례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를 참패한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당시 원내대표였던 박영선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국민공감비대위원회'를 꾸렸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이상돈 중앙대 교수를 비대위원으로 영입하려 했다가 당시 친노(친노무현) 주류 의원들과 강성 지지자들의 반발을 사서 찍혀나갔다. 이 과정에서 박 위원장은 압박이 가중되자 잠행과 칩거에 돌입했으며, 사상 초유의 비대위원장 탈당 가능성까지 제기돼 당은 대혼돈에 빠졌다. 박 위원장을 무리하게 찍어내고 '문희상 비대위'를 새로 세운 친노 주류의 내상도 심각해, 이듬해 4·29 재보선 참패와 분당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박영선 위원장 '찍어내기'도 당헌·당규에 규정된 절차가 없다보니 그야말로 '인민재판식 성토'로 진행됐다. 친노 주류 의원들이 연일 SNS를 통해 성토하고 매일 아침마다 라디오에 나가 "물러나라"고 압박하며, 의원총회에서 집단 규탄에 나서는 식이었다.
다만 이러한 '찍어내기'를 하려면 원내외의 압도적 여론이 뒷받침돼야 한다. 당시 박영선 위원장은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이완구 원내대표와 해왔는데,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입장을 취해 단원고 유가족을 등에 업고 여론전을 펼친 친노 강경파 의원들과 강성 지지층의 불만을 이미 사고 있었다. 게다가 박근혜정부 창출에 기여했던 이상돈 교수도 새정치연합 지지층 사이에서 비토 여론이 강해 이를 도화선 삼아 '박영선 찍어내기'가 가능했다.
반면 지금 한동훈 위원장은 전국 시·도당을 돌면서 신년인사회를 통해 당원과 지지자들 앞에 데뷔해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오른 상황이다. 시·도당을 도는 동안 국민의힘 의원들도 힘을 싣고 기대감을 표명하는 발언을 잇따라 했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나도 한동훈 위원장이 우리 지역 신년인사회에 왔을 때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힘을 싣는 발언을 했지 않았느냐"라며 "어제의 우리의 영웅이자 구세주가 오늘 알고보니 역적이고 타도돼야할 대상이라고 손바닥 뒤집듯이 논리를 급변침하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김기현 체제'를 스스로 허물고 새로 세운 '한동훈 체제'를 다시 한 달만에 끌어내리고 또 새로운 지도체제를 세워 79일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대응한다는 것은 여론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지지층에서조차 납득하기 쉽지 않을텐데, 당밖의 중도층은 도대체 국민의힘을 뭐라고 생각하겠느냐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국민의힘 또다른 의원은 "서울·경기도나 충청도에서는 (한동훈 위원장을 지금 끌어내린다는 것은) 도저히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닐 것"이라며 "심지어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의원들조차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공천이 곧 당선'인 대구·경북 의원들과, 본선 이전에 일단 지역구를 잡아 공천부터 받고 봐야 하는 비례대표 의원 일부가 먼저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경북 의원들은 22일 긴급 회동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로 환부된 '김건희 특검법' 재의결을 여전히 국회에 계류시켜놓고 있는 것도 대통령실과 친윤 진영의 부담이다. 하필 영부인 문제로 한 위원장을 찍어내는 과정에서 의원단 분열이 심화되면, 민주당이 '김건희 특검법'을 재의에 부쳤을 때 이탈하는 의원이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해 "국민이 걱정하실 만한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정도의 발언을 한 한동훈 위원장을 찍어냈다가, 강제수사권을 동반한 특검법이 재의결로 통과돼버리면 용산 입장에서는 '게도 구럭도 잃는 상황'이 돼버리고 만다.
이와 관련, 여권 관계자는 "조용히 수면 아래에서 거취를 정리했으면 상관이 없는데,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용산도 적극적으로 압박 수위를 높이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쌍방이 냉정을 되찾고 물밑 교섭을 통해서 출구전략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이 경우 김경율 비대위원의 출마나 거취 문제를 놓고 교섭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사태로 인해 쌍방 간의 신뢰가 훼손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향후 총선 공천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해서 양측의 긴장을 유지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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