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기록

윤정훈 2024. 1. 22.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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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위에 성실하게 지어낸 세 권의 책.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봤다.
「 김대균 」
Instagram@chakchakstudio

Q : 최근 집에 대한 인문학적 시선을 담은 〈집생각〉을 펴냈습니다.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다양한 공간을 지어왔는데, 특별히 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A : 집은 오피스나 갤러리처럼 일정 형식을 따르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공간이에요. 건축가로서 주택을 설계하며 집에 관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기술적 내용이나 단편적인 팁보다 집을 어떻게 대하고 사용하면 좋을지 이야기하고 싶었죠.

김대균 소장.
김대균의 〈집생각〉 표지.

Q : 집을 잘 사용한다는 것은

A : 건축가가 만든 집을 ‘하우스’라고 부를 순 있어도 ‘홈’이라고 할 순 없어요. 홈은 하우스와 일상이 만드는 화학작용의 결과죠. 장기간 여행을 떠나면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듯, 사람은 저마다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어요. 집과 나 사이에 끈끈한 연결점이 있는 거죠. 바슐라르는 “집이라는 건 어릴 때 경험했던 변주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어요. 또 다른 ‘나’로서 집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요.

해남 유선관.

Q : 선진국 인구의 25% 정도가 현재 사는 곳을 정서적 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연구를 사례로 들었어요. 왜 집은 ‘홈’이 될 수 없을까요

A : 일상에 대해 자각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니체는 어느 날 산속을 거닐다 커다란 바위를 보고 우리 인생과 유사하다는 걸 발견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쳇바퀴 돌 듯 반복되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일상을 자각하고 사랑하는 힘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은 ‘일상’을 잘 인지하는 순간에서 시작돼요. 그 일상의 중심에 집이 있고요. 인식하지 않은 채 습관대로 사용하면 집은 ‘하우스’에 그치고 말아요.

Q : 집을 통해 내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A : 사람은 언제 가장 나다울까요. 일하거나 타인과 교류할 때? 내가 사는 동네나 아파트 평수가 나를 얼마나 대변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선호하는 수면 환경을 고심하며 고른 커튼과 이불, 사소한 취향이 반영된 컵. 이런 것들이 모여 ‘홈’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Q : 당신이 오랜 세월 거주한 이 집을 ‘홈’으로 만들어주는 게 있다면

A : 지금 앉아 있는 이 소파 자리가 특별해요. 아침 일찍 출근해 초저녁쯤 퇴근하는데,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보곤 하죠. 서향 창이라 오후가 되면 붉은 햇빛이 깊게 들어옵니다. 하늘의 색이 바뀌는 걸 한 30분쯤 보고 있으면 ‘이런 게 사는 거지’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일이나 걱정거리를 떠나 ‘비로소 이곳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란 어떤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고, 매순간 자각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믿어요. 그런 순간이 켜켜이 쌓여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죠.

풍년빌라.

Q : 요즘은 SNS나 ‘오늘의집’ 등을 통해 멋진 집을 구경할 기회가 많습니다. 좋은 집, 나다운 공간을 만들 때 다양한 사례를 접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A : 그럼요.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거기서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지’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면 집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해상도 높은 TV는 무척 단편적인 대답이죠. 잘 생각해 보면 친구랑 함께 보는 게 좋은 건지, 주변과 단절된 환경에서 오는 몰입감을 선호하는 것인지, 맛있는 걸 먹으며 봐서 만족스러웠던 건지 알 수 있어요. 내게 맞는 해법의 실마리가 드러나는 거죠. 이미지와 모방 사이에 자신을 집어넣어야 ‘내가 살기 좋은’ 기반을 마련할 수 있어요.

Q : 〈집생각〉에서 “나를 바꾸고 싶다면 자기계발서보다 집을 환기하고 청소하는 것을 추천한다”고도 했어요. 집과 자존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A : 집을 통해 내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자는 동안 많이 뒤척였는지, 건강하게 먹고 있는지. 청소를 통해 집을 정갈하게 가다듬다 보면 내가 온전해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깨끗하게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순간 찾아오는 안도감과 만족감 같은 것 말이에요. 집을 돌아보고 비워내는 행위는 나를 찾아가는 시작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계발서보다 유용할 수 있는 거죠. 또 공간이 정리돼야 뭘 하든 집중도 잘되고요.

Q :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 공부 시간을 늘릴 게 아니라 쉽고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공간가짐’ 역시 같은 맥락이겠네요

A : 생각보다 마음가짐은 믿을 만한 게 못 돼요. 공간가짐을 잘하면 마음가짐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같아요.

누하동 한옥.

Q : 클라이언트 중에서 집의 변화를 통해 삶이 바뀐 이도 많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A : 성북동에 있는 15평 정도의 작은 집을 인테리어한 적 있어요. 부부와 아들 세 가족이 살았는데, 현관문을 열면 주방 겸 복도가 나타났죠. 주방 맞은편에 아이가 게임을 하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가족이 함께할 방법을 고민하다 주방과 작은방 사이의 벽을 없애고 동그란 테이블을 뒀어요. 그랬더니 그 테이블이 집의 중심이 되더라고요. 각자 다른 곳에 있어도 소리와 온기를 나눌 수 있게 됐죠.

Q : 가구란 ‘집에서 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표현도 흥미로웠어요. 나에게 맞는 가구를 고르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A : 가구는 옷과 같아요. 마음에 들면 사이즈부터 확인하잖아요. 치수가 가장 중요해요. 공간마다 잘 맞는 크기가 다르거든요. 쇼룸에선 멋있었는데 막상 집에 들이고 보니 너무 크거나 작은 경우도 많죠. 두 번째는 색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해요. 집을 이루는 다른 요소와 유사한 톤이되 다른 질감을 선택하면 공간이 한층 디테일해져요. 그 가구를 통해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Q :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다면

A : 3~4년 이내에 서울 아닌 다른 지역에 집을 지어볼까 해요. 바람과 볕이 잘 들고 멍하니 볼 수 있는 풍경이 필요하겠죠. 어릴 때부터 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살았거든요. 그땐 창 너머 바다가 보였습니다. 무엇이든 지금 이 집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고, 그곳 역시 나다울 거예요.

「 푸하하하프렌즈 」
Instagram@fhhhfriends

Q : 때는 바야흐로 2013년, 한 건축사사무소에서 동료로 만난 윤한진 · 한승재 · 한양규가 차린 회사가 지금의 ‘푸하하하프렌즈’예요. 얼마 전 10주년 기념 에세이집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를 냈죠

A : 한승재(이하 재) 처음부터 거창하게 10주년을 기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출판사로부터 개인적으로 집필 제안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 아무리 생각해도 뭘 쓸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푸하하프렌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제안했어요. 회사 얘기라면 쓸 거리가 무궁무진했거든요.

한양규, 한승재 소장.
푸하하하프렌즈의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표지.

Q : 집부터 카페, 음식점, 복합문화공간, 대형 사옥까지 여럿 걸출한 건물을 지어왔습니다. 건축가로서 두껍고 큰 작품집에 대한 로망은 없었나요

A : 재 사진이나 도면만 있는 작품집이나 그럴싸한 철학을 늘어놓는 방식으로는 보여줄 게 제한적이에요. 건축은 실생활과 무척 밀접한데 기존의 건축 책은 너무 낭만적인 경향이 있어요. 실제는 클라이언트와의 수없는 논의, 지난한 허가 과정, 시공 현장의 돌발 상황 등의 연속인데. 저희는 페터 춤토어나 알바루 시자 같은 건축가가 아니에요. 사진이나 도면보다 ‘과정의 치열함’에 저희의 정체성이 있죠. 과정 중 질척거림이라고 해도 좋고요(웃음).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싶어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했어요.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재밌게 읽었으면 했고요.

Q : 소장과 직원을 포함해 열다섯 명이 함께 쓴 책이죠. 어떤 식으로 분량을 나눴나요

A : 재 다 같이 모여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있던 프로젝트를 쭉 리스트업했어요. 누군가 법규 때문에 엄청 고생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에 대해 쓰는 식으로요. 사용 승인 과정에서 발생한 아찔한 사건부터 다 같이 스타크래프트를 하다 직원 한 명이 발끈해 육성으로 욕했던 일까지. 그 자리에서 쓸 거리를 바로바로 나눴어요. 제5공화국 시절 작전 내리듯이(웃음).

Q : 웃긴 에피소드뿐 아니라 일하다 생기는 구성원 간의 크고 작은 신경전, 하나의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지리멸렬한 과정이 담겨 있어요. 공통적으로는 일에 대한 진심이 느껴져요. 다른 건 몰라도 건축이라면 누구든 대충하는 법이 없는 것 같아요

A : 재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팀원이든 소장이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꼭 한 명씩 나타나요. 그 한 명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끝까지 가는 거죠. 일종의 상호보완인 셈이에요.

연희동 주택 ‘집 안에 골목’.

Q : 가장 집요한 사람은

A : 재 일할 때만큼은 모두 집요하고 진지해요. 팀원 중 현석이라는 친구는 “와, 다했다”고 말해 놓고선 “근데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더!”라면서 미세하게 치수를 조정해요. 저도 가끔 설계 다 해놓고 막상 이상해서 뒤집을 때도 있고요.

Q : 한양규 소장은 무엇에 집착하는 편인지

A : 한양규(이하 규) 설비요. 뼈대 세우고 예쁘게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 많아요. 그런데 설비까지 세심하게 고려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사람으로 치면 몸속 장기나 다름없는데, 그런 것까지 꼼꼼히 설계해야 잘 지은 건물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어떤 건물은 계단실에 냉난방 설비를 전략적으로 몰아 배치하면 주 사용공간의 천장고를 높일 수 있어요. 또 임대 건물 한 층에 식당이 새로 들어오면 아래층 천장을 뜯고 공사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저는 애당초 그런 일이 없게끔 하고 싶어요. 팀원들이 설계하면서 디자인이나 재료를 고민할 때 저는 도면 보면서 “에어컨 어딨냐?”고 외치기 바빠요(웃음). 기본을 지키는 게 제겐 재밌고 중요해요.

녹번동 주택 ‘고안된 장식들’.

Q : “우리의 창작은 언제나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문장도 있습니다. 요즘은 무엇이 싫은가요

A : 규 건축 재료의 물성에 대한 고려 없이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건물이요. 잘 사용되지도 않는데 작품이라고 일컫는 건물도 싫어요.

A : 재 싫은 게 너무 많은 나머지 우선순위가 없어진 지경에 이르렀는데, 요새는 얄쌍한 게 별로예요. 예쁘게 만들려다 너무 얇아진 나머지 휘청거리는 핸드레일, 이쑤시개처럼 얇아서 도통 여는 맛이 안 나는 문손잡이 같은 거요. 예쁜 것보다 튼튼한 게 좋고, 그 튼튼함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신축 빌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만 빌트인이지 공장에서 찍어낸 가구도 싫어요. 벽이나 천장 사이 1~2cm 정도 애매한 틈을 만들거든요.

Q : 그럼에도 여전히 건축에 대해 갖는 낭만이 있다면

A : 규 사용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건물을 짓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막연하고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좀 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는 건물을 꿈꿔요.

A : 재 건축을 통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뀔 거라는 믿음. 부동산 논리가 우세한 상황에서 유지하기 쉽지 않지만, 헛될지라도 그런 믿음을 계속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 건축인 것 같아요.

Q : 10년을 함께한 비결도 궁금하네요

A : 규 믿음에 기반해 적당히 관심이 없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동업하면 사사건건 서로 확인하려고 들잖아요. 저희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았어요.

임대형 근린생활시설 ‘후암동의 추억’.

Q : 지금의 푸하하하프렌즈가 아닌 다른 미래를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이를테면 세 사람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A : 규 종종 생각하는데, 제 자신이 되게 꼴 보기 싫었을 것 같아요. 저는 계획적인 사람이에요. 기회주의자에 가까울 정도로요. 건축 일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면 돈을 빨리 벌 수 있을지 빠르게 판단이 섰어요. 그런데 승재랑 한진이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얘네는 그냥 건축을 좋아하는 애들이었어요. 덕분에 저도 순수하게 건축에만 집중할 수 있었죠. 계획대로 안 돼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혼자 회사를 차렸으면 돈은 많이 벌었겠지만 몸을 불사르다 번아웃이 왔을 거예요. 대신 제가 없었더라면 승재는 이상한 짓 벌이다가 망했겠죠(웃음). 지금 함께하는 직원들을 만난 것도 저희에겐 큰 행운이에요.

Q : 푸하하하프렌즈가 남길 다음 기록은 무엇일까요

A : 재 4년 전부터 한 감독님이 저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어요. 그분이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거라 언제 완성되고 공개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런데 중요한 건 안 찍더라고요. 웃기죠. 대신 별 추악한 꼴이 다 담겨 있어서 사실 아무도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웃음).

「 정지현 」
Instagram@photo_jihyunjung

Q : 재개발되는 아파트 단지부터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건물까지 다양한 건축물이 철거되거나 지어지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 왔죠. 건물을 피사체로 삼은 건 언제부터였나요

A : 아버지가 필름카메라를 취미로 모으셨어요.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죠. 잠실에 살며 종로와 성수에 있는 건축물을 찍으러 다녔는데, 2호선을 탔을 때 본 도시 풍경이 무척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요. 사진학과 진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주제 역시 건축이었어요. 서울에서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을 여러 번 촬영해 이미지를 겹친 작업이었죠. 그러다 건축을 실질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어 건설현장을 방문하기 시작했어요.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덕분에 자연스럽게 현장의 생리를 익히게 됐습니다.

정지현 작가.
정지현의 〈유령작업실〉 표지.

Q : 2013년부터는 철거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A : 잠실주공아파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4년 전까지 살았어요. 인근에 초고층 타워가 들어서는가 하면, 주변에 신도시도 여럿 생겨났죠. 인접한 단지까지 재개발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인천 가정동 신도시 재개발구역을 알게 됐고,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에 입주해 매일 그곳을 촬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Demolition Site 04’(2013).

Q : 당시 철거를 앞둔 아파트 내부를 빨간색 페인트로 칠하고 그것이 없어지는 장면을 담았어요. 단순 기록을 넘어 현장에 개입하는 일이 왜 필요했나요

A : 재건축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철거현장에 들어가 슬픈 분위기의 사진 몇 장을 찍는 건 무척 단편적인 것 같았어요. 시간과 비용, 체력과 감정 소모가 상당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했어요.

Q : 이후 건물이 새롭게 지어지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송은문화재단 사옥, 삼일빌딩 리모델링 시공 현장을 기록하는 커미션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A : 해외의 경우 대규모 미술관을 지을 때 단순 아카이빙 이상의 의미로 예술가에게 기록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요. 공사 전 건축가로부터 도면과 공사 스케줄을 받아 진행 방식과 특징적인 공법을 파악하는데, 상업 건축사진과 구별되기 시작하는 지점이죠. 상업 건축사진에는 건물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멋진 모습이 담기지만 해당 건축물의 중심이 되는 건설 기법이나 장소적 특성은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Q : 그런가 하면 지금은 창동에 있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시공현장을 기록하고 있다죠

A :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현장이에요. 굴착 공사가 시작되니 각종 폐기물이 묻혀 있던 터라 오색찬란한 색의 흙이 보이더군요. 그런 지층의 단면을 촬영한 작업으로, 2021년 송은미술대상전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시공현장은 2022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곳 역시 진행되는 건설 방식이 무척 독특해요. 내부 구조가 비행접시처럼 구성될 예정이라서요.

‘Specter Workroom 10 2524’(2023).

Q : 신축현장을 개인 작업 대상으로 삼아 ‘컨스트럭트(Construct)’ ‘리컨스트럭트(Reconstruct)’라는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어요. 작업의 주안점은

A :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데이비드 치퍼필드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에요. 국내에서 보기 힘든 좋은 자재를 사용해 마치 건물을 세공하듯 만들더군요. 최신 건축 기술이 적용되는 현장이라 일반 자재보다 얇고 가변적인 경우가 많았어요. 이를테면 두꺼운 벽으로 하는 단열 처리가 그보다 훨씬 얇은 재료로 가능했죠. 이런 건축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현장에서 자재와 폐기물을 수집하고 공간에 재배치해 새로운 이미지로 남겼어요.

Q : 부서지거나 지어지는 건물의 면면을 포착한 작업에서 알 수 있듯 정지현의 시선은 대개 사라지는 것에 머물러요.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됐나요

A :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해 많이 고민해요. 우리는 무언가 사라지면 그때 비로소 사진을 찾아요. 누군가 죽거나 무언가 없어지면 사진을 보며 추억하죠. 철거현장을 촬영할 당시 사진만 찍을 게 아니라 철거된 벽을 그대로 가져와 전시하라는 조언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야 작가로서 성공한다고요. 저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제가 촬영한 것들이 없어지고 눈으로 볼 수 없게 됐을 때 비로소 제 사진이 가치를 갖게 된다고 믿었거든요.

‘Construct 02’(2017).

Q : 지난해 말 펴낸 〈유령작업실〉에는 시각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출판사,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서점이 함께 사용하는 건물의 신축 과정이 담겼어요. 그간의 작업과 또 다른 방식으로 선보인 이미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A : ‘슬기와 민’의 최성민 디자이너가 송은미술대상 전시에서 제 작업물을 보고 연락을 주었어요. 전체적으로 타일로 마감된 건물 각 층의 앞뒤 면이 유리로 돼 있었는데, 그 부분이 촬영할 때 사용하는 라이트박스 같았어요. 건물 자체를 사진을 만드는 하나의 틀로 여기고 건물 안으로 드는 빛과 그것이 내부에 미치는 영향을 포착했죠. 여기에 건물을 짓는 과정까지 아울렀는데, 사진 위에 실크스크린을 겹쳐 인쇄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실크스크린의 매력은 우연성이에요. 기술과 회화의 중간에 있달까요.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회화처럼 흘러내리는 흔적이 나타나요. 어떤 잉크와 효과를 쓰는가에 따라 평면에서도 공간감을 만들 수 있고요.

Q : 그래서인지 사진에서 추상화가 연상되더군요. 작업방식에 계속 변화를 주는 이유는

A : 오래전부터 사진이라는 매체가 현대미술에서 무엇을 전개할 수 있을지 연구해 왔어요.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이미지가 빠르게 소비되는 때이기도 하죠. 사진가들이 영상이나 3D 장비를 다루면서 사진 작가보다 미디어 작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이미지를 평면에서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진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어요.

Q : 앞으로 작업 대상으로 삼고 싶은 건축물이 있다면

A : 제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 오랜 기간 재개발이 논의되고 있는 곳이에요. 철거가 진행된다면 사진가로서 현장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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