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칼럼] ‘강제 당론 투표’ ‘제왕적 당대표’ 폐지가 정치 혁신이다

최훈 2024. 1. 2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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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주필

총선 79일 앞의 예비후보들이 ‘금배지’ 꿈에 부풀어 뛰고 있다. 각자의 사회적 성취를 토대로 국가·국민을 위해 선량을 해보겠다는 멋진 포부와 열정을 응원하고 싶다. 현실은 그러나 참담하다. “강경파가 박수부대를 동원해 의원총회에서 밀어붙인다. 수시로 당론을 정해 안 따라가면 가차 없이 징계다. 강제 당론이 일상이다. 당대표까지 공천권을 갖고 횡포 부리니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왜 하냐고…. 그냥 한 번 더 하기 위해서가 유일한 목표들이다.”

「 의원 소명은 오로지 국익 위한 양심
거대정당 당론 강압, 의원 영혼 말살
공천권 횡포 당 대표직 하등 불필요
철폐 없인 어떤 정치 개혁도 공염불

민주당을 탈당한 조응천 의원의 ‘초선 4년’ 토로다. 정치가 왜 이 모양인지 정곡(正鵠)을 짚었다. 야도, 여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인재 영입’이다, ‘새 피 수혈’이다 마술피리에 홀려 따라간 의원들은 총선 다음 날부턴 영락없는 거대 정당의 노예 신세다. 짧은 79일의 유권자 상전 노릇이 끝나면 국민도 거대 정당 밑 노예의 길 시작이다. 지금의 총선은 후보·정당·국민 3자의 ‘노예계약서’ 서명식일 뿐이다. 영원한 악순환이다.

주범은 ‘강제적 당론 투표’와 ‘제왕적 당대표’다.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46조2항)고 헌법은 적시했다. “선출된 의원이 선거구민, 정당 및 이익단체 등의 특수이익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을 추구하도록 보장한 자유 위임의 원칙”이라고 헌법재판소는 2019년 해석했다.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만이 ‘양심’이다.

현실은 거꾸로다. 지난 연말 쌍특검법안 통과를 보자. 야권 183명 투표에 ‘50억 클럽’ 특검은 183명 찬성,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182명 찬성. 그 찬반 논리를 차치하고, 21세기 대낮에 무슨 ‘북한식 투표’ 느낌이다. 당론에 따른 투표 추종도와 자기들끼리의 정당 단합도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일 터다. 물론 여당 역시 당론으로 투표 전 퇴장했으니 크게 할 말도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당내 이탈표에 ‘개딸’들의 ‘수박 색출’ 난동 역시 같은 맥락.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스스로 예종하는 풍토가 생긴 건 가장 슬프다. 당대표 경선 당시 여당 초선의원 50여 명이 ‘나경원 비난’ 연판장을 돌리며 용산에 주파수 맞춘 장면은 ‘영혼 소멸’의 상징이다. 영혼들이 없어지니 민주당의 가장 보수적 의원과 국민의힘의 가장 진보적 의원 사이, 즉 중도온건파는 모두 멸종이다. 민주적인 당내 토론도 함께….

당론 강제는 우리 의회를 심각한 위헌·위법적 상태로 만들었다. 국회는 국가의 기구다. 정당은 사적 결사체일 뿐이다. 정당법 2조는 “정책 추진, 공직선거 후보자 추천,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이 목적인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 정당을 규정한다. 자발적 결사체가 국가 기구인 국회의원들의 의사를 강제 구속하는 게 바로 위헌·위법적이다. 어느 법률에도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다른 암 덩어리, 제왕적 당대표다. 모든 분란·갈등의 진원이다. 박정희 시대와 군부 정치, 3김 시대의 극한 대결 속에 강력한 자기 진영 통제를 위해 만든 제도가 당 총재다. 스스로는 당권을 징검다리 삼아 차기 대권을 노린다. 그리 하려니 모든 공천권과 당직 인사, 자금 루트를 거머쥐며 의원들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용산이 억지로 만든 김기현 당대표의 블랙코미디 경선, 한 틈의 대선 패배 성찰도 없이 당대표로 직행, 방탄 사당화 논란을 자초한 이재명 대표의 사례를 보라. 당대표 만들어 이익 공유를 꾀했던 게 송영길 캠프의 경선 돈봉투 살포 아닌가. 하등 쓸모없는 옥상옥 계륵(鷄肋), 당대표다.

미국처럼 의원들이 선출한 여야 원내대표가 독립적인 의회의 입법·정책을 주도해 가면 될 뿐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역시 야당 대표가 아니라 입법부 소속인 여야의 원내 지도부와 정책을 협치해 가면 될 터다. 평소 국고보조금·후원금 등을 관리하다 선거나 전당대회 즈음 공정한 후보 경선의 룰과 과정을 관리해 주는 미국 정당의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공화당 RNC, 민주당 DNC)’ 정도 느슨한 조직이면 충분하다. 인사 청탁과 민원 창구일 뿐인 지역구 당협(지구당) 또한 선거 때의 한시적 자원봉사 조직이면 족하다. 당대표 눈도장 찍으러 몰려다닐 시간, 의정에 충실토록 하자. 당론 추종과 충성심만을 공천 잣대 삼는 건 망국의 지름길이다. 물론 꼼꼼하게 의정 성과를 계량해 공천에 반영할 데이터 시스템이 선행돼야 한다. 정치 신인 충원을 위해선 당원만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여론, ‘새피’ 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새 시대의 공천 시스템이 나와야 할 시간이다.

“천국에 가더라도 정당과 함께라면 가지 않겠다”(토머스 제퍼슨)는 비유처럼 우리 공룡 정당들은 극한 혐오의 대상이 된지 한참이다. 후보들에게 “불체포 특권 포기” “금고 이상 시 세비 반납” 등 갑질만 해댈 게 아니다. 쇄신의 대상은 바로 그 거대한 기득권 정당과 그 당의 제왕들이다. 강제 당론 투표, 전횡 일삼는 당대표직을 없애겠다고 국민에게 공약하라. 그것만이 진정한 정치 교체다. 그런 혁신에 표를 주고 싶다.

최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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