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판 촛불 시위, 공주 '수운 최제우 신원 운동'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 문화와 인종, 정치체제를 뛰어넘어 화합을 통한 절대 선(善)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개개인의 인격 완성은 물론이다.
여기에 비추어 초기 동학은 엄밀히 종교라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형식상 갖추어야 할 경전이나 조직체계를 앞세우지 않았고, 사회모순이나 의식의 허점을 보완함은 물론 현실타파와 개혁을 주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사상에 가까웠다 할 수 있다.
2000년 대 초반 평화적 시위로 정착한 촛불이, 2017년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한 매듭을 완성한다. 1890년대에도 지금의 촛불을 능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으니, 바로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신원 운동'이다.
▲ 철교와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 본 금강과 금강철교. |
ⓒ 이영천 |
이에 한계를 느낀 기층 민중에 의해 자연스럽게 제기된 움직임이 바로 신원 운동이다. 억울하게 처형당한 교조의 지위를 합법화함으로써 자유로운 포교 활동과 탐학한 관리의 수탈을 벗어나겠다는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사 '신원 운동' 기록이다.
임진년(1892)의 일이다. 도(道)가 전라, 충청 양도 사이에 널리 퍼지자, 관리의 탄압이 심하여 동학당이면 편히 앉아서 살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조선이란 나라의 세력은 날로 기울어 가고 백성들은 날마다 망국가(亡國歌)를 부르며 동학을 믿고 입교하게 되자, 탐폭(貪暴)한 관리들은 이것을 기회 삼아 동학당이라면 무조건 잡아다가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판이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38에서 의역하여 인용)
공주 집회가 시작이다. 교단이 주도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운동에서 기층 민중이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핵심 권력과 사회모순을 어떻게 자각하고 싸워나가는지, 또 변화무쌍한 각 상황에 효율적인 대응책을 세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민중이 얼마나 현명한지 알 수 있다.
공주(公州)
▲ 공주 시가지 공산성에서 바라 본 공주 시가지. 사진 가운데다 공주 시가지 남쪽을 가로 막은 산악지이다. |
ⓒ 이영천 |
좁은 분지의 평탄한 곳에 들어앉은 도시 남쪽은 험한 산이 막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백제 도읍지였으며, 조선 후기 충청도 4목(牧) 중 으뜸으로 충청감영이 있었다. 배(船) 모양의 도시가 북쪽으로 항해하는 형상이다.
▲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를 중심으로 한 공산성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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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의 옛 도시들이 일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걸었듯, 공주도 정치·행정·경제 등 충청도 수부 지위를 대전에 넘겨주고 지금은 한적한 모습의 지방 도시다. 이는 철도, 고속도로 등 교통시설로부터 소외되어 오랜 기간 자본의 축적이 이뤄지지 못한 탓이다. 일종의 차별 정책의 결과로, 반일(反日) 기운이 드센 도시들이 대부분 이런 대접을 받았다.
2000년대 지방 분권 정책에 따라 건립된 세종시 영향으로, 공주는 금강 이북으로 도시 세력을 확장하는 추세다.
조심스러운 시도, 공주 집회
▲ 충청 감영 포정사 조선시대 충청도의 정치와 행정 중심을 이루던 옛 감영 터에 복원된 포정사. 신원운동 당시 수천 농민이 이 앞에서 꿇어 엎드렸을 것이다. |
ⓒ 이영천 |
하지만 최시형은 앞날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던 지도자답게 1892년 10월 17일(음) 소위 입의통문(立義通文)을 통해 신원 운동은 동학도의 의무임을 강조하고, 신원 방법을 보다 적극성 있게 진행하라 지시한다. 동학사 '신원 운동'의 기록이다.
이해(1982) 7월에 서인주, 서병학 두 사람이 선생께 "방금 우리 도(道)의 급무가 선사(先師)의 신원 하나에 있나이다"하고 의견을 말하자, 선생은 "아직 은인자중하라" 대답했다. 이해 10월에 사방에 있는 도인들이 탄압에 쫓겨 모여들고 신원할 일을 청하는 자 또한 계속 늘어남에 따라 선생은 여러 사람의 뜻에 따라 허락하고 곧 입의통문을 지어 공포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39에서 의역하여 인용)
이에 고무된 동학 교인들은, 서인주와 서병학이 충청 관찰사 조병식에게 신원하는 것을 알고 공주 장날 구름같이 모여든다. 그런데 예상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무지막지한 탄압을 각오했으나, 10월 22일 의외로 유화적인 답변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 공주사대부고 옛 감영 터를 차지하고 있는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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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집단 신원에 조병식이 평소 행태와 달리 유화적인 답을 내놓은 건, 조병식 개인의 정통성 부족과 관리로서 예전 저지른 이력이 작용했을 수 있다. '국법이 아니라고 규정한 동학을 금(禁)하고 허(許)하는 건 오로지 조정에서 결정할 일'이라며 신원 책임을 회피하면서 관리로서 책무를 교묘하게 피해 나간다. 이런 결과는 교인들에게 교조 신원에 대한 또 다른 기폭제로 작용하게 된다.
공주 집회의 사람들
▲ 공산성 공북루 금강에 면한 공북루와 공산성 생활터전. |
ⓒ 이영천 |
서장옥은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다가, 국면의 전환점이나 일의 전개에 커다란 희생이 필요한 정점에 홀연히 나타나 솔선수범하는 실천을 통해 큰 방향을 정해준 인물이다. 전봉준과도 교분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혁명 과정에서 전술·전략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혁명의 방향성을 명징하게 제시한다.
이두황과 성하영은 전투와 관계없이 경기·충청 일대에서 무수한 양민을 학살했다. …(중략)… 서병학이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공주전투에서 농민군이 패전하자 한패는 남쪽으로, 또 다른 한패는 동북쪽으로 달아났다. 손병희는 최시형을 보호하며 전라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해서 영동 지방을 거쳐 보은 땅으로 들어갔다. 이때 경리청의 구상조는 영남의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펴며 이들을 추격했다. 당시 서병학은 경리청 참모관으로 청산, 옥천, 영동 지방에서 길잡이를 했다. 그는 예전에 목숨을 걸고 모시던 최시형과 죽음을 두고 맹세하며 뜻을 같이하던 손병희를 잡기 위해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파랑새는 산을 넘고. 이이화. 김영사. 2008. P32~33)
또 다른 무리는 왕비가 총애한 무당 진령군 눈에 들어 고위 관직에 앉은, 조병식이나 전라 관찰사 이경직 같은 자들이다.
조병식의 탐학도 조병갑 못지않았다. 둘은 사촌 간이다. 조병식은 왕비 밀명으로,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감시하기 위해 톈진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함경도 관찰사일 때 흉년을 핑계로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일본으로 곡물 유출을 차단했다가, 조약위반이란 일본 항의로 11만 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한 장본인이다. 이런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도 파직을 면한 건 오로지 왕비에 기생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 감영 앞길 충청 감영 앞길. 포정사에서 바라 본 모습. 이곳에 수천 농민이 엎드려 신원했을 것이다. |
ⓒ 이영천 |
충청감영 앞 좁은 길에 몸 굽혀 선처를 바랐을 수많은 군중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신기루였을까. 일하는 만큼 배곯지 않고, 부모와 자식을 온전하게 건사하는 아주 평범한 현실의 세계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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