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찾아오시오" 이병철 회장이 사랑한 국보

임영열 2024. 1. 2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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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물유적] 국보 '가야금관'과 '청자 동화연화문 주전자'

[임영열 기자]

 삼성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애지중지했던 국보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좌측)과 ‘청자 동화연화문 주전자’(우측) 리움미술관 소장
ⓒ 문화재청. 리움미술관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三星)'그룹의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 호암 이병철(湖巖 李秉喆 1910~1987). 경상남도 의령에서 양반가의 천석꾼 아들로 태어나 무역업, 제분업, 모직업, 비료 사업에 뛰어들어 삼성을 국내를 넘어 글로벌 대기업으로 키웠고 말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대한민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성장시킨 한국경제의 큰 나무.

사업을 통해 나라와 사회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과 '인재제일주의'로 한국경제를 선도했던 그를 사람들은 '돈병철'이라 불렀지만 호암은 기업 외 영역에서 사회에 공헌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55회 생일을 맞은 1965년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문화 영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삼성가의 문화재 사랑
 

문화·예술을 사랑한 호암이 우리 문화유산에 가졌던 애정과 관심은 각별했다.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시·서·화와 골동품을 접하며 자랐기 때문이었다. 28살이 되던 1938년 대구에서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지역 유지들의 모임인 '을유회'에 가입해 서화·도자기 등 고미술품을 감상하며 일찍이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지킨 간송 전형필에 이어 우리나라 최대의 문화재 수집가가 호암 이병철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호암의 뿌리 깊은 문화재 사랑은 그가 이룩한 '경제적 업적'이라는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1976년 경기도 용인에 착공해 1982년 개관한 ‘호암 미술관’
ⓒ 호암미술관
     
이 회장의 문화재 사랑은 미술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문화재의 보존과 수집, 연구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6년 경기도 용인에 우리나라 고유의 건축미를 살려 경주 불국사를 연상케 하는 미술관을 착공했다.

1층은 불국사의 백운교와 같이 아치형 돌계단을 설치하고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어 아름답고 웅장하게 꾸몄다. 1982년에 개관한 호암 미술관은 지금도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미술관이 완공되고 호암은 평생 동안 애써 모은 토기와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 불상, 금속유물 등 2000여 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호암의 골동품 수집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평생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며 해외로 밀반출되거나 국내에 방치된 문화재들을 사들였다. 이렇게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문화재 중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만 해도 수 십 건이 넘는다.

호암의 문화재 수집은 대를 이어 범 삼성가로 이어진다. 삼성의 2대 이건희 회장 또한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백자 마니아로 특히 조선초기 청화백자에 대해 상당한 감식안과 지식을 가졌고 미대 출신의 홍라희 여사는 분청자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3대 이재용 회장 또한 금석학에 조예가 깊고 고지도(古地圖) 수집이 취미라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회장과 달리 전문가들의 확인만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다고 한다. 삼성의 일류 지향 경영철학과 맞닿아 있다. 이건희 회장이 국보 '고구려 금동반가사유상'을 구입할 때의 일화는 아직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2대에 걸쳐 모아진 소장품들이 호암 미술관에서 다 소화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삼성에서는 2004년 새로운 미술관을 건립했다. 이것이 바로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리움(Leeum) 미술관이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설립자의 성씨 'Lee'에 미술관을 뜻하는 museum의 'um'을 따서 작명했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3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현대식 미술관이다.
  
 서울 용산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남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리움미술관’ 2004년 개관했다
ⓒ 리움미술관
 
호암과 리움 미술관에서 나누어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삼성 컬렉션'의 질과 양은 거의 독보적이다.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삼성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국보는 37점, 보물은 103점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국립 경주박물관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국보로만 봤을 때 우리나라 전체 국보의 10%를 넘는 수치다.

그러던 2021년 4월, 2대 이건희 회장이 작고하고 반년이 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나왔다. 그동안 삼성가에서 모았던 소장품 중 이건희 회장이 소유한 2만 3천여 점을 국가에 기증한다는 거였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명명된 세기의 기증에는 국보 14점과 보물 46점 등 총 60 건의 국가지정 문화재가 포함됐다. 분류 작업을 끝낸 이건희 컬렉션은 전국을 순회하며 다양한 주제로 전시되고 있으며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2만 3천 여점이 빠져나갔지만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은 여전히 국내 최대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가의 소장품 중 국보는 무엇이 있을까. 생전에 이병철 회장이 수집한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는 50여 점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호암이 특별히 사랑했던 두 점의 국보가 있다.

이병철 회장이 매일 안부를 물었던 '가야금관'
 
 국보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 문화재청
 
1971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동안 이병철 회장이 모은 '호암 수집 문화재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 특별한 금관 하나가 나왔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들은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에 나무 가지를 형상화한 '출(出)'자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세움 장식이 붙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드리개 장식이 귀걸이처럼 늘어져 있는 게 일반적 형태였다.
이런 신라 금관에 비해 이 금관은 높이 11.5cm, 밑지름 20.7cm로 훨씬 작다. 머리에 두르는 넓은 테두리 위에 4개의 풀꽃 장식이 자연스럽게 솟아있다. 관테에는 타출기법으로 새긴 작은 점들이 무수히 찍혀 있고 원형의 금판을 달아 장식했다. 군데군데 굽은 옥이 달려있다.
  
 신라 금관총 금관(좌)과 가야금관(우) 가야금관은 신라 금관에 비해 소박하다
ⓒ 문화재청
 
부속 금제로 원형, 꽃형, 은행형, 곡옥 금고리, 금제 드리개 등이 함께 나왔는데 금관의 어느 부분에 어떤 모양으로 붙어 있었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금관의 장식품인데 끝을 펜촉처럼 다듬은 4개의 풀꽃모양 장식에 돌기를 달아 굽은 옥을 걸 수 있게 했다.
화려하고 큰 신라 금관에 비해 수수한 이 금관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해 12월 국보로 지정된 '가야 금관'이다. 정식 명칭으로는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다. 지난해 9월 우리나라에서 16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인 경북 고령 지산동 45호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야금관의 장신구
ⓒ 문화재청
 
대가야 전성기인 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금관은 1960년대 도굴꾼들이 도굴한 것으로 골동품상을 거쳐 호암 미술관으로 넘어갔다. 도굴꾼들은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 회장은 선의에 의한 취득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병철 회장은 미술관에 출근하면 금관이 무사한지 안부부터 물었고 부속 유물들을 직접 금관의 몸체에 붙여보며 들여다볼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도난당할 것을 걱정해 한동안 똑같이 만든 복제품을 전시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 회장이 얼마나 이 금관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 금관은 두 점이다. 리움미술관에 소장된 것 외에 또 다른 한 점은 아쉽게도 일본에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도굴 문화재 수집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불법으로 반출해 국립도쿄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오구라 컬렉션'으로 명명된 '창녕금관'이다.

일본에서 되찾아온 '청자 동화연화문 주전자'
 
 국보 ‘청자 동화연화문 주전자’. 일본에 반출된 것을 1970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되찾아 왔다. 리움미술관 소장
ⓒ 리움 미술관
 
가야금관과 함께 이 회장이 애착을 가졌던 또 한 점의 국보가 있다. 일본의 어느 신문 기고문에서 " 나의 소장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이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아꼈던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다. 1970년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높이 33.2㎝, 밑지름 11.4㎝로 당당한 크기다.

표주박 모양을 본뜬 몸통을 연잎으로 둘러싼 형태로 양각, 음각, 퇴화, 상형, 동채 등 고려청자에서 사용하는 모든 제작 기법을 총동원했다는 점에서 명품 중의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주전자의 잘록한 목 부분에 동자가 연꽃 봉오리를 두 손으로 껴안고 있다.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가느다란 손잡이 위에 깜찍한 개구리 한 마리를 앉혀 놓았다.

물이 나오는 주둥이는 연잎을 길게 말아 붙였고 뚜껑은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연꽃 한 송이가 막 피어나려고 하는 찰나의 순간을 표현했다. 고려청자 중에서도 예술성과 화려함이 뛰어난 작품으로 고려의 최고 상류층인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담이지만,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도입 부분에서 목종이 연회를 베푸는 장면에 이 주전자가 소품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의 명품 청자들은 고려 중기 때 작품으로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고려 초기 와는 시기적으로 거리가 멀다.

고려의 르네상스 시기라 할 수 있는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주전자는 1963년 강화도에 있는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항(崔沆 ?~1257)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일본으로 밀반출 됐던 것을 이병철 회장이 되찾아 온 것이다.
  
 고려 중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높이 33.2㎝, 밑지름 11.4㎝.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항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 됐다.
ⓒ 리움 미술관
 
1970년 일본 오사카시립박물관에서 경매를 겸한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경매에 출품되는 최고의 걸작은 단연코 '청자 동화연화문 주전자'였다. 소식을 접한 호암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대리인을 오사카로 급파했다.

"일본에 다녀오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오시오..." 이병철 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경매 당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드디어 휘황찬란한 비색의 연화문 주전자가 나왔다. 2천만 원에서 시작된 경매는 서로 치고받는 사이 경매가 3천만 원이 넘어서면서 경매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3천5백만 원이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땅! 땅! 땅! 경락을 알리는 경락봉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3천 원이 채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 봤을 때 수십 억 원이 넘는 거금이다.

'물유각주(物有各主)'라는 말이 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는 말로 "모든 물건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라는 뜻이다. 명품에는 창작자의 예술혼과 함께 소장자의 영혼이 담겨 있다. 가격을 떠나서 가치를 알아봤던 호암의 안목과 문화재 사랑이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주전자는 일본의 어느 이름 모를 미술관 구석에 전시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전자의 잘록한 목 부분에 동자가 연꽃 봉오리를 두 손으로 껴안고 있고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가느다란 손잡이 위에 깜찍한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 리움미술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40호(2024년 01, 0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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