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전력에도 무너진 플랜A, 흔들리는 클린스만의 황태자들
[이준목 기자]
▲ 허탈해하는 조규성 20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앗수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 E조 2차전 요르단과 한국의 경기. 조규성이 자신의 슛이 골대를 벗어나자 아쉬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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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스만호가 대참사의 위기에서 간신히 기사회생했다.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월 20일 카타르 도하의 알투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E조 2차전에서 요르단과 2-2로 비겼다.
비긴 게 다행인 경기였다. 한 수 아래로 꼽혔던 요르단(피파랭킹 87위)에 무난히 승리를 챙기며 16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지으려 했던 한국(23위)은, 손흥민의 PK 선제골로 앞서나갔으나 박용우의 자책골과 야잔 알나이마트의 역전골을 잇달아 허용하며 2-1로 뒤진 채로 전반을 마쳤다. 요르단의 파상공세에 내내 두들겨맞은 한국은 추가골을 헌납할 만한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후반에도 요르단의 밀집수비와 침대축구를 뚫지 못해 패색이 짙어가던 한국은 후반 추가시간 황인범의 슈팅이 수비를 맞고 들어가며 간신히 동점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1차전 바레인전(3-1) 승리에 이어, 2차전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챙긴 한국은 일단 골득실에서 요르단에 뒤진 조 2위를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불과 하루 전 이라크에 1-2로 덜미를 잡힌 라이벌 일본처럼 이변의 희생양이 되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했다.
패배는 면했지만 클린스만호 역시 이번 대회에서 우승후보라는 기대에 걸맞는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번 아시안컵에 나서는 한국대표팀은 손흥민, 김민재, 황희찬, 이강인, 황인범,이재성 등 유럽파 호화멤버를 앞세워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클린스만 감독은 아시안컵의 결과를 통하여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선언하며 64년 만의 우승에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클린스만호는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황희찬과 김진수 등 주전급 멤버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하며 조별리그에서 결장중이고, 요르단과의 2차전을 앞두고서는 주전 골키퍼 김승규가 팀 훈련 중 십자인대 파열로 낙마하는 악재가 겹쳤다. 공격수 황의조는 사생활 논란으로 국가대표 자격을 잠정 박탈 당하며 엔트리에 들지도 못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조별리그 2경기에서 거의 동일한 선발라인업을 유지했다. 2차전에서 골키퍼가 김승규에서 조현우로 부득이하게 바뀐 것을 제외하면 필드 플레이어는 변동이 없었다. 현재의 선발멤버가 클린스만이 생각하는 베스트 라인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작 2경기 만에 '플랜A'가 흔들리고 있다. 수비와 중원, 공격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모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그 위기의 중심에 '클린스만의 황태자'들이 있었다는 게 더 뼈아프다.
소속팀 경기에서 몇 달 동안이나 출전하지 못했던 풀백 이기제는 클린스만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김진수의 부상으로 공백이 된 왼쪽 수비수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조별리그 2경기 연속 선발출전하고도 극도의 부진으로 후반에 조기교체되는 굴욕을 반복했다.
▲ 박용우의 자책골 20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앗수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 E조 2차전 요르단과 한국의 경기. 한국 박용우가 자책골을 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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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우 역시 클린스만호 출범 이후 중용되기 시작한 대표적인 선수다. 박용우는 소속팀에서 인종차별 논란으로 도마에 올랐음에도 클린스만호에서 A매치 데뷔에 성공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전임 벤투호에서 중용받던 정우영과 백승호, 중국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며 구금 상태에 놓인 손준호 등을 제치고 지난 6월 이후 박용우를 사실상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낙점됐다.
하지만 박용우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포백수비를 보호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박용우의 부진은 김민재를 비롯한 포백의 공간 커버와 체력 부담이 가중되는 나비효과로도 이어졌다. 요르단전에서는 세트피스 수비에서 뼈아픈 자책골을 기록하며 상대에게 흐름을 넘겨주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고 결국 후반에 교체당했다. 사실상의 문책성 교체였다. 중원 파트너인 황인범이나 교체투입된 홍현석-박진섭 등이 더 안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박용우의 부진이 더욱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공격진에서는 믿었던 조규성의 침묵이 뼈아프다. 조규성은 클린스만호 체제에서 황의조-오현규를 제치고 주전 공격수로 올라섰다. 하지만 2023년에 치러진 A매치 10경기에서 2골에 머물며 최근 활약이 저조한 상황이었다.
조규성은 본선 첫 경기였던 바레인전에서 두 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모두 허공에 날렸다. 요르단전과의 전반 추가시간에도 이기제의 중거리 슈팅이 골키퍼 손을 맞고 나오며 조규성이 완벽한 오픈 찬스를 맞이했지만 빗맞은 슈팅은 바운드 되면서 골문 위로 한참 떠오르는 홈런볼이 되고 말았다. 2경기 연속 침묵한 조규성은 결국 후반 오현규와 교체됐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플랜A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땅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애초부터 플랜B를 고려하지 않았던 클린스만 감독의 자만심이 불러온 부메랑이다.
이기제의 경기감각 문제와 측면 수비수 부족, 노련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부재, 대체 공격수 발굴 등은 이미 아시안컵 이전부터 꾸준히 클린스만호의 약점으로 공공연하게 거론되었던 이슈들이다. 그리고 클린스만 감독은 이를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클린스만 감독은 전문가들과 팬들의 지적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번 아시안컵은 엔트리가 23인에서 26명으로 확대되며 여유있게 선수단을 꾸릴 수 있었음에도 취약포지션인 풀백이나 공격수에는 추가보강없이 최소한의 인원만 발탁했다.
반면 이미 자원이 넘쳐나는 2선 공격수(7명)나 중앙수비수(5명)는 과도한 포지션 중복으로 엔트리를 낭비했다. 항상 뽑는 선수만 뽑고 새로운 선수들을 발탁을 통한 경쟁이나 실험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클린스만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으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국내 선수발굴은 코치진에게 위임하고 주로 해외에서 체류하며 근무태만 논란에 휩싸였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쓰는 법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클린스만 감독은 역대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사상 최강의 전력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직까지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잘 모르는 듯한 모습이다. '자율축구'라는 허울 좋은 포장 뒤에 가려진 클린스만 감독의 전술적 능력 부족과 본업 소홀이 우려한 대로 대표팀의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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