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필리핀, 남중국해 영유권 놓고 한판 붙나 [김규환의 핸디 차이나]
中해경선, 필리핀선박에 물대포 쏘고 순찰하며 영유권 시위
필리핀, 남중국해 주변 9개 섬과 암초에 군기지 건설 맞불
마르코스의 대만 총통 당선인 축하 놓고 막말 설전 이어가
중국과 필리핀 간에 금방이라도 한판 붙을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서로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스카버러 암초(黃岩島) 인근에서 해경선이 필리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쏘는 등 도발을 일삼는 중국을 겨냥해 남중국해의 섬과 암초를 개발해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결정하는 등 필리핀이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패기만만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는 남중국해 주둔병력 환경개선을 위해 배타적 경제수역(EEZ) 내 군기지 시설을 개선하기로 했다고 AFP·로이터통신 등이 지난 16일 보도했다. 로메오 브러너 필리핀군 합참의장은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며 “필리핀이 남중국해에서 점유하고 있는 섬을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주둔 병력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우리 군이 더 많이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브러너 합참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남중국해에서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온 필리핀 측의 강경 조치로 해석된다. 필리핀이 ‘주둔병력 생활환경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군장비뿐 아니라 신규 병력을 추가 배치할 공산이 커진 만큼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은 1950년대 남중국해에 알파벳 ‘유’(U)자 형태로 자체 영해 개념인 ‘구단선(九段線)’을을 긋고 이 안(남중국해 전체의 90%)을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며 인접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국제상설재판소(PCA)가 2016년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중국은 오히려 남중국해에 임의로 조성한 인공섬에 활주로와 레이더 등 군사시설을 늘리며 ‘실효지배’에 나서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태평양 진출을 염두에 두고 중국은 1980년대 태평양 섬을 사슬처럼 연결하는 ‘가상의 해상 경계선’인 도련선(島鏈線·열도선)을 설정했다. 쿠릴열도에서 시작해 일본·대만·필리핀·말라카해협에 이르는 제1도련선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남중국해를 내해로 만드는 게 필수적인 요소다. 그래야 태평양에서 미국과 직접 맞서는 제3도련선까지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이다.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에 집착하는 것은 이곳이 지닌 지정·지경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태평양의 일부로 동북아와 동남아 사이에 있는 남중국해는 스프래틀리(南沙群島)와 파라셀(西沙群島), 프라타스(東沙群島), 매클즈필드(中沙群島) 등 4개의 군도에 700여개 섬, 산호초·암초로 구성돼 있다. 길이 3000㎞과 폭 1000㎞, 면적 124만 9000㎢의 규모다. 한국 면적보다 12배 이상 크다. 바다 밑에는 300억t(세계 매장량의 10%) 규모에 달하는 원유가 매장돼 있고 세계 해상 물동량의 30% 이상이 오가는 물류 요충지이기도 하다.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필리핀은 1999년부터 세컨드 토머스 암초(仁愛礁)를 포함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 주변 9개의 섬과 암초를 점유하고 이를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포함시켰다. 이들 섬과 암초에 군사기지를 구축한 필리핀은 이중 가장 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스프래틀리군도의 티투섬과 난산섬, 세컨드 토마스 암초 등에 담수화 장치와 통신장비를 새로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필리핀군의 이런 구상은 섬 주둔 병사들이 물을 얻으려면 물품 보급선을 기다리거나 빗물을 모아야 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일부 섬에선 함정과 군용기, 레이다 등을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지난달에 필리핀이 티투섬에 레이다, 위성통신 등 첨단 장비를 갖춘 해안경비기지를 마련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이유다. 중국 해상 병력동향을 살피고 데이터를 수집해 대(對)중국 감시망을 강화하려는 목적이다.
브러너 합참의장은 “필리핀 (안보) 초점이 기존 내부 방어에서 영토주권으로 옮겨진 데 따른 조치”라며 “지금 군이 주둔하는 시멘트 구조물(기지)은 군대 규모에 비해 너무 작다”고 강조했다. 필리핀 매체 마닐라 타임스는 “하원 세출위원회도 티투섬 활주로 확장 등 시설 현대화에 15억 페소(약 358억 5000만원), 난산섬 항구시설 건설에 8억 페소를 각각 배정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함께 남중국해 공동순찰과 연합 군사훈련도 강화하고 있다. 두 나라 군은 지난해 11월 21~23일 남중국해 필리핀 측 EEZ에서 공동 순찰 활동을 한데 이어 올해 들어 3~4일에는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소속 함정 4척과 필리핀 군함 4척을 동원해 공동 순찰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해 2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의 필리핀 방문을 계기로 중국의 안보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남중국해에서 공동 순찰을 재개하기로 합의한데 따른 것이다.
중국 역시 이곳에 해군과 공군 병력을 보내 순찰에 나서며 맞불을 놨다. 인민해방군 남부전구는 소셜미디어(SNS) 공식계정을 통해 "3∼4일 해군·공군 병력을 조직해 남중국해 해역에서 정례 순찰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 영자지 글로벌타임스(GT)는 "이번 순찰이 미국과 필리핀의 도발적 행동을 겨냥하는 조치"라고 분석했다.
외교부도 나서 미국과 필리핀을 향해 무책임한 행동을 멈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왕원빈(汪文斌) 외교부 대변인은 4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미국과 필리핀이 남중국해에서 무력을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하는 것은 해상 분쟁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관련 당사국이 무책임한 행동을 멈추고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는 지역국가들의 노력을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민주진보당(민진당) 부총통의 총통 당선을 인사를 건네면서 중국은 끝내 ‘막말’을 쏟아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15일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필리핀 국민을 대표해 대만의 다음 총통으로 선출된 라이칭더(賴淸德) 당선인의 선출을 축하한다"며 "앞으로 양국이 긴밀히 협력해 상호 이익을 강화하고 평화를 증진시키고 두 나라 국민의 번영을 보장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은 필리핀을 향해 잇단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내고, 필리핀 대사를 초치해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마오닝(毛寧) 외교부 대변인은 16일 정례브리핑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과 중국-필리핀의 수교 성명을 엄중히 위반했고, 필리핀이 중국에 한 정치적 약속을 심각하게 어긴 것이자 중국 내정에 대한 난폭한 간섭"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단호히 반대한다"고 경고했다.
중국 정부는 이어 베이징 주재 필리핀대사를 불러 해명을 촉구하고 "대만문제를 두고 '불장난'을 하지 말고 이와 관련된 잘못된 언행을 즉시 중지하기를 엄숙히 알린다"고 으름장을 놨다.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해서는 "책을 많이 읽고, 대만문제의 내력을 정확히 이해하기를 건의한다"며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마오 대변인은 18일 브리핑에서도 "대만문제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중국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히 응징하겠다"며 "대만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 중 핵심이며 14억 중국 인민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필리핀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필리핀 국방부는 17일 성명을 통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이토록 저열하고 상스러운 표현에 유감을 표한다. 그는 우리 대통령과 국민을 모욕했다”며 “저들은 정치체제의 대리인에 불과하며 매번 국가의 선전선동과 가짜뉴스를 반복한다”고 맞받아쳤다. 길베르토 테오도로 국방장관도 직접 나서 언론 입장문을 내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수준 낮고 저속하게 대통령과 필리핀 국민을 모욕했다"고 성토했다.
중국과 필리핀은 친중 성향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임 대통령과는 달리 마르코스 대통령이 2022년 6월 말 취임한 뒤 미국과 ‘철통같은 동맹’을 맺으면서 두 나라관계가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의 턱 밑에 미군에 필리핀 군사기지 네 곳의 사용 권한을 주는 등 확실한 친미 행보를 이어가는 등 끊임없이 중국을 ‘자극’하고 있다. 미군이 사용 권한을 확보한 군사기지에는 필리핀이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 최전선과 대만에서 불과 360㎞ 떨어진 최북단 지역이 포함됐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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