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박사 따고 93세 작가 변신…한때 '수출 여왕'의 새 도전
지난해 만 92세 나이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국내 최고령 박사’ 기록을 세웠던 이상숙(93)씨가 이번엔 작가로 변신했다. 사업가이자 엄마로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을 지나 87세에 만학도의 길을 택한 여정과 그 안에서 깨달음을 담은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를 펴낸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24일이다.
지난 19일 서울 광진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씨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있었다. 이씨는 지난해 성공회대 일반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아 화제가 됐다. 그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담지 못한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며 “보수·진보, 좌파·우파, 남북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군부 독재, 산업화·민주화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이씨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서울로 상경했다. 6·25 전쟁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지만, 야간 학교에 다니며 일을 할 정도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후 결혼하고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뒤에도 배움에 갈증이 있던 이씨는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61년 숙명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교수 추천을 받아 국립서울모자원에서 수예 교사로 일했다. 당시 가르치던 학생들과 함께 만든 작품을 종종 전시했는데, 이를 우연히 본 미군 여성 장교가 부평 미군기지 군 매점(PX)에 매장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얼마 뒤 이씨는 PX 매장을 정리하고 ‘소예인형연구소’란 이름으로 창업했고, 이는 완구회사 ㈜소예산업으로 이어졌다. 회사에서 제작한 봉제 인형 등은 백화점에 납품됐고, 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수출개발팀이 수출길을 뚫어주면서 사업은 점점 커졌다. 한 때 이씨는 ‘수출 여왕’으로 불리며 대통령표창과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1960년대 중반,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기업을 경영하는 건 쉽지만은 않았다. 이씨는 “수출을 위해 봉제 인형을 가방에 가득 채워 유럽으로 수입상을 만나러 갈 때면, 해외 공항에 대기하던 택시기사들이 체구가 작은 동양 여성인 나를 보고 한참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정도로 여성과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이씨는 “아주 힘들었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다”며 힘들 때면 기도를 드리고 남몰래 눈물을 쏟으며 견뎌냈다”고 했다. 커지는 부담을 이기지 못해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지인의 조언을 듣고 사찰을 찾아갔던 일화도 언급했다. “무인도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아갔는데 모두 따뜻하고 친절했다”며 “절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며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사업가로도, 엄마로도 100점이 되고 싶었던 이씨가 분투한 과정도 고스란히 담겼다. 이씨는 집필하면서 가장 재밌었던 건, 엄마로서 자식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식민지 콤플렉스’로 변명했던 과거를 되돌아본 부분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 (자식을) 엄하게 대하는 걸 보면서 자랐고, 난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이들이 조금 잘못하면 회초리를 들고 야단을 치고 있더라”고 말했다. 일본강점기 억압을 견뎌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들이 가까운 이들에게 엄격하게 했던 모습을 자신이 꼭 빼닮았다는 의미다. 이씨는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반성하고, 또 수차례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95년 약 30년 만에 사업을 그만둔 뒤엔 여성경제인협회장, 숙명여대 총동문회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부회장,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위원장 등을 지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87세가 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회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18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씨의 꿈을 잊지 않은 딸이 용기를 북돋웠다.
대학원에선 자기 삶의 뿌리였던 신앙을 토대로 분단 등 수많은 갈등·반목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다. 이씨는 “젊었을 땐 신경 쓸 것이 많아 오히려 공부가 힘들었다”며 “요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여전히 배우는 시간이 재밌고 즐겁다”고 말했다.
이씨가 책을 쓰기로 결심한 건 기성세대로서의 책임감도 작용했다. “진영 논리를 떠나 과거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며 갈등이 왜 생겼는지 젊은이들에게 알려 주고 미래 세대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세계 유일 분단 문제를 풀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올바른 민족 의식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보람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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