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가 부르는 서태지 노래…29년만에 돌아온 '시대유감'
잠이 들려는 찰나 방 안에 있던 텔레비전과 컴퓨터, 그리고 모든 것이 지진난 듯 들썩이기 시작한다.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괴물로 변해버린 전선(電線)에 쫓기다가 마주한 수많은 화면,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캐릭터의 얼굴이 이내 파편화된 화면 조각들로 뒤덮인다. 지난 12일 공개된 서태지의 29년 전 노래 ‘시대유감’의 뮤직비디오다.
2017년 25주년 콘서트 ‘타임 트래블러’ 이후 별다른 외부 활동이 없었던 서태지가 오랜만에 ‘시대유감’으로 돌아왔다. 리마스터링한 버전의 음원과 함께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서태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대유감’의 오피셜(공식) 뮤직비디오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리릭(가사) 비디오 형태로 새롭게 제작했다”고 밝혔다.
이 노래에서 가사의 의미는 각별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 4집에 다섯 번째로 수록됐지만, 앨범이 발매된 1995년에는 가사 없는 연주곡 형태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네’ 등의 가사가 반사회적이고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사전 심의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가사를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은 서태지는 아예 가사를 들어내 버리는 방안을 택했다.
팬들의 항의는 빗발쳤고, 이를 계기로 1996년 6월 음반 사전 심의제도는 없어졌다. 1933년 일제가 만든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을 시작으로 음반에 대한 사전 검열이 이뤄진 지 60년 만이다. 그해 7월 서태지는 본래 가사를 담아 ‘시대유감’을 싱글로 제작해 발표했다. 29년이 흐른 올해 발표한 뮤직비디오엔 서태지를 형상화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과거 문제가 됐던 가사는 큼지막하게 강조됐다.
올해 그가 ‘시대유감’을 다시 꺼내 든 이유는 뭘까. 시작은 리메이크 승인 요청을 받으면서였다고 한다. 서태지 측은 “(SM엔터테인먼트로부터) ‘시대유감’ 리메이크를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아티스트 본인이 곡에 대한 애착이 큰 데다 곡 자체도 음악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리메이크 허락을 넘어 원곡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을 직접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2021년부터 K팝 역사를 재조명하는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SM 측은 “한국 대중음악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젊은 세대의 심경을 반영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곡”이라며 ‘시대유감’을 작업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리메이크엔 후배 가수인 걸그룹 에스파가 참여했다. 멤버 4명 모두 2000년대 생으로 원곡보다 늦게 태어났다. 리더 카리나는 리메이크 곡 소개 영상에서 “서태지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사실은 저희와 동떨어지고 멀게 느껴졌었다”면서도 “(작업하면서) ‘거 짜식들 되게 시끄럽게 구네’ 등 가사 하나하나가 너무 재밌고 와 닿았다”고 말했다. 멤버 지젤은 “옛날 노래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모두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가사이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공개된 에스파 버전의 ‘시대유감’은 원곡에서 반복되는 가사를 줄이고, 카리나와 가수 비와이가 작업한 랩 가사를 새롭게 넣었다. SM 측은 “원곡이 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했다면, 랩 메이킹에선 바뀐 현실 속에서 한층 자유로워진 너와 나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곡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대한 메시지를 다면적으로 완성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에스파의 강점인 시원한 고음을 넣어 저항을 넘어선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표현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시대유감’은 서태지의 수많은 곡 중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저항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음악 시장은 시대를 초월한 접근성이 특징인데, 이 시대에 필요하거나 시의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과거의 노래를 끌어올 수 있게 됐다”면서 “30년 전 ‘시대유감’을 끌어와 (상대적으로) 요즘엔 부재한 저항성·시대 의식을 다시금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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