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책과 결혼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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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책 없이는 잠시도 못 견디는 사람.
그리고 정작 당사자인 -아니, 이 경우는 '당사서(書)'라고 해야 할까- 책은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책이든 사람이든 역시 결혼에 관해서만큼은 저마다의 관점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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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두 번째는 책 사는 걸 즐기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책 없이는 잠시도 못 견디는 사람. 새해를 맞아 헌책방 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방문한 손님 A씨는 확실히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그런 사람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눈빛부터 다르다. 문 건너편 자리에 주인장인 내가 앉아 있으니 보통 손님이라면 가볍게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A씨는 처음부터 오직 책장만 보인다는 듯 내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말없이 책장 사이를 누비던 손님은 책 몇 권을 가져와 내 앞에 내밀었다. 기분이 좋은 듯 그는 활짝 웃었다. 언뜻 보니 얼굴에 주름이 꽤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어쨌든 평범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나는 책을 종이봉투에 담아 손님에게 주면서 “책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슬쩍 말을 걸었다. 그는 좋아할 뿐 아니라 아예 책과 같이 살고 있다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도 어느 면에서는 책과 함께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방이 사방으로 책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책을 받아든 A씨는 놀랍게도 자신이 곧 책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 말을 농담으로 생각해 같이 웃어줬다. 하긴 어떤 뉴스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미소녀 캐릭터와 사귄다는 사람도 있었잖은가. 사랑의 종류도 다양해진 세상이니 책과 하는 결혼도 나쁘지 않겠지.
“책은 말이죠, 여러 권을 동시에 읽고 좋아해도 질투를 안 하잖아요. 이 책을 좋아해서 읽다가 다른 책에 마음이 끌려도 양심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장점이죠. 게다가 준비해야 할 살림이라곤 책장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딱히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책과 결혼했을 때의 장점을 길게 늘어놨다. 한참을 듣고 있자니 농담이 아닌 것 같아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인 -아니, 이 경우는 ‘당사서(書)’라고 해야 할까- 책은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책과 결혼한 사나이의 장광설은 마치 발터 베냐민이 ‘일방통행로’에서 책에 관해 쓴 문장처럼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손님은 또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는데 약 2주가 지난 지금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또 다른 헌책방을 돌며 책을 사 모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사이 정말로 책과 결혼한 걸까.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은 그때 A씨의 말을 듣고는 내가 ‘서재 결혼시키기’라는 책을 권했는데 정작 그 책은 사지 않았다는 거다. 책이든 사람이든 역시 결혼에 관해서만큼은 저마다의 관점이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나만 별생각 없이 어영부영 새해를 맞은 것 같아 기분이 머쓱하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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