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이 번다"더니…中 파견 北 노동자 수천 명, 폭동 일으켰다
북한이 근로자를 파견한 중국 동북부의 지린(吉林)성의 공장 여러 곳에서 최근 임금 체불에 반발하며 북한 노동자 수천 명이 연쇄 파업과 폭동을 벌여 북한 정부가 진화에 나선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북한 외교관 출신의 탈북민인 고영환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은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복수의 현지 소식통들을 통해 1월 11일부터 지린성 소재 봉제·수산물 가공 공장 등에서 나흘 간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 북한 정부 관계자들이 현장에 나가 이를 진화한 것으로 확인했다”며 “북한 당국이 이들의 임금을 중국 측으로부터 받고도 이를 북한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때 ‘김일성의 불어 통역사’로 알려진 고 특보는 1991년 탈북해 한국에서 꾸준히 북한 관련 연구와 방송 활동을 했다. 지난해 9월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에 임명됐다.
이와 관련, 국정원 관계자는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있어, 관련 동향을 주시 중”이라고 말했다. 고 특보가 파악한 바와 같은 맥락으로,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는 이유다.
이번 사건은 북한 국방성 산하의 중국 내 외화벌이 회사들이 코로나19가 확산하는 기간 동안 근로자들의 임금을 ‘전쟁 준비 자금’ 명목으로 근로자들 몰래 평양에 전액 상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각국의 북한 노동자 고용을 금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로 인해 2019년 북한은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모두 귀국시키려 했지만, 코로나19로 국경을 봉쇄하면서 다수 노동자들이 중국·러시아 등지에 그대로 남게 됐다. 중국 기업들은 2020년 이후 북한 측에 노동자 임금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 측이 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가 진정되면 귀국할 때 한꺼번에 주겠다”며 임금 지급을 미뤘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고 북·중 간 왕래가 재개되면서 근로자들은 이 돈이 평양으로 전부 흘러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됐고 “돈을 떼어 먹었다”며 격분해 파업에 돌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파업에 동참한 이들은 주로 봉제·섬유 공장과 수산물 가공 공장 소속이었으며, 일부 건설 노동자들도 동참했다고 한다.
일부는 공장 설비·집기까지 파손하면서 극렬히 저항했다. 고 특보는 “일부 직장에서는 공장장, 직장장, 반장 등을 가둬놓고 노동자들이 몰매를 때리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말했다. 단순 파업이 아니라 폭동 수준의 물리적 충돌 상황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에 놀란 북한 당국은 이번 사건을 ‘특대형 사건’으로 규정해 선양 주재 북한 영사와 보위원들을 현지로 급파했다. 이들이 “당의 이름을 걸고 돈을 지불하겠으니 파업을 풀고 일을 계속 해달라”고 이들을 설득해 폭동 나흘 째인 15일 간신히 사건을 봉합했다.
이후 북한 정부는 중국 주재 북한 외교관, 회사 사장 등 무역대표부 관계자들을 비롯해 외화벌이 고위 주재원들에게 십시일반 현금을 갹출해 근로자들에게 체불 임금을 조금씩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15일 이후부터는 공장들이 재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 노동자들이 연쇄 폭동에 나선 데에는 ‘현대판 노예’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근무환경이 원인으로 꼽힌다. 고 특보는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은 임금의 60% 이상을 북한 간부들에게 반납해야 하며, 연간 약 8000달러(약 1060만원)가 정권 상납금인 ‘충성자금’으로 바쳐진다”면서 “기숙사비와 식비까지 빼면 노동자 손엔 한 달에 200~300달러(약 27만~40만원)가 남는다”고 전했다.
안보리 제재 이전만 하더라도 북한이 해외 노동자 파견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약 5억 달러(약 66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주된 외화벌이 통로였다. 북한의 해외 파견 절차는 관련 기관별로 차이는 있으나, 해외 파견 신청서를 당국에 제출하면 철저한 신원조사와 간부 면접을 거친 후 신체 검사, 국가 보위성 강습 등 10개월에서 1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쳐 출국하게 된다.
그럼에도 “해외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이 퍼져 500달러(약 66만원)에서 최대 2000달러(약 260만원)에 이르는 돈을 노동당 간부들에게 뇌물로 주고 선발을 희망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해외에 파견되면 매일 8시부터 자정까지 15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쉬지 못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파견자들의 탈북을 막기 위해 북한 당국이 여권을 회수하고 외출과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철저한 통제와 감시가 이뤄진다.
이번 사태는 바꿔 말하면 이처럼 ‘당성’을 인정받고, 엄격하게 관리되는 파견 근로자들이 대거 파업에 동참할 정도로 불만이 쌓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 당국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서 기자로 일했던 문성희 박사는 2022년 11월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의견을 말하지 않고 지도부의 지시를 묵묵히 따라가는 편이지만, 자기 생활·생계와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체제의 안정이나 김정은 리더십에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북한 당국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특보는 “북한의 해외 근로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이번 폭동을 계기로 북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조건이 드러났다”면서 “북한은 각종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확보를 위해 해외 파견을 통한 외화벌이를 지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서울=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서울=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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