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압박 시달려 사극 선택한 개척자, 이두용 감독 별세

성하훈 2024. 1. 1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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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대련', '물레야 물레야', '뽕' 연출... 향년 81세

[성하훈 기자]

▲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김동호-이두용 2020년 평창국제영화제 참석한 당시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과 이두용 감독(오른쪽).
ⓒ 이정민
 
한국영화의 액션영화의 대가였던 이두용 감독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1942년생인 이두용 감독은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선구자였으나 검열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약되는 현실 속에서 사극을 통해 영화세계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적 주목을 받기도 한 한국영화의 대표적 감독 중 하나였다. 연출작이 63편이고 각본과 각색, 제작자로 나선 영화까지 포함하면 필모그라피가 103편에 달한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인생은 학창시절 <원탁의 기사>(리차드 소프,1953), <쿼바디스>(머빈 르로이,1951), <십계>(시셀 B. 드밀,1956), <애수>(머빈 르로이,1940), <녹원의 천사>(클래런스 브라운,1944) 등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 지낸 게 계기가 됐다. 고인은 생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청파동 일대의 학교나 효창운동장에 설치되는 가설극장 같은 곳에 부모나 누나를 따라가서 <검사와 여선생> <며느리의 설움>같이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들을 보곤 했다"며 "웃고 울리는 변사의 입담과 활동사진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대학 다니는 학교 선배가 영화 조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나중에 영화감독 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를 만날 일이 있어 만리동 촬영소에 갔는데 그는 대뜸 자기가 쓰고 있던 기록판을 건네주며 자기가 하라는 대로 기록하라고 해 스크립터 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하다 보니 대학 진학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그 일에 빠져들게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조감독이었던 선배가 영화를 배우지 않겠냐고 제안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스크립터를 거쳐 조감독으로 연출 수업을 쌓고서, 1970년 멜로드라마인 <잃어버린 면사포>로 감독 데뷔한다. 초기에는 데뷔작과 같은 멜로드라마를 몇 편 작업한 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해외에도 팔릴 수 있는 영화장르를 고민하다가 액션영화를 생각해냈다. 그 후 1974년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일련의 태권도 영화들을 연출했다.

이두용 감독은 좁은 우리나라 내수 시장만 바라보고 한탄할 게 아니라, 우리 영화를 해외에 진출시켜 돈을 벌어들여 국산영화에 투자해야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이건 단순한 애국심이나 낙후돼 있는 우리 영화산업을 위한 기특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내 영화를 살찌게 하기 위한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 실천으로서 각 나라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이해하기 쉬운 액션물을 떠올렸던 것이었다.

일반적인 액션영화는 할리우드가 너무 잘 만들었기에 그들이 잘 모르는 색다른 액션영화를 만들어 외국인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고민 속에 전략적으로, '발'을 쓰는 태권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속 돌아온 외다리> <배신자> 등 6편의 태권도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언론이나 영화계에선 그들을 연기자 취급하지 않고 '으악새 배우'로 부르고, 이두용 감독을 향해 '으악새 영화'(조연 액션 배우들이 '으악'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영화) 전문 감독이라며 당시의 액션 영화를 낮춰 불렀다.

검열에 시달려 사극 선택했으나
 
 이두용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이에 서운함을 느낌 이두용 감독은 액션 영화를 접고 <초분>(1977), <물도리동>(1979) 등의 토속적인 소재의 영화를 찍는다. 1978년에 촬영을 시작해, 1년 동안을 촬영에 매달린 김성종 원작의 <최후의 증인>(1980)은 분단을 소재로 다룬 것 때문에 검열 당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3시간 가까운 편집본을 제작사에서 절반 정도를 자진 삭제하여 개봉하게 된다. <최후의 증인> 감독의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누군가 정부기관에 투서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인 얘기는 안 되고,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그리면 큰일나고' 하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검열 관행은 그를 검찰청에 불려가게 했는데, 영화에서 빨치산의 인간적인 내면을 표현한 부분을 문제 삼았던 것이었다.

이후 검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소재를 찾아 나섰는데, <피막>(198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뽕>(1985), <내시>(1986), <업>(1988) 등 토속적 삶이나 동양적 생사관을 그려낸 사극 작품들이다.

이두용 감독은 사극이 사상-정치 문제 등으로 걸릴 게 없다고 판단했으나 이 예상은 빗나갔다. <내시>에서 내시감이 반란하는 마지막 장면을 본 검열기관장이 '쿠데타'가 연상된다며 한동안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검열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본의 사전 검열 제도가 폐지되면서 다소 숨통을 트게 된다.

이두용 감독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1980년작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ISDAP상을 수상하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영화 최초의 칸영화제 진출이었다. 1990년대에는 <청송으로 가는 길>(1990), <흑설>(1990), < 위대한 헌터 GJ >(1994), <애>(1999) 등을 연출하고, 2002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자신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했다.

이두용 감독의 1980년대 이후 작품들이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피막>으로 1981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1983년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청송으로 가는 길>은 1990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및 감독상을 수상했다. 2020년에는 춘사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5년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한국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에 임명됐다. 2007년 시네마테크친구들 영화제에서 특별전을 시작으로 부천영화제와 부산영화제 등에서 회고전과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 선정한 한국대표 영화인 35인에 포함됐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5호에 마련됐고, 발인은 21일 일요일 오후 1시다. 서울추모공원을 거쳐 남야주에덴추모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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