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도 분통 터뜨린 '고려거란전쟁',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김종성 2024. 1. 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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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고려거란전쟁>

[김종성 기자]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과 관련된 논란이 18일자 언론들에 보도됐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요약하면, 드라마가 명군인 고려 현종을 '바보'로 만들어 소설 원작자가 "극대노"했다는 내용이었다.

논란의 출발점은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가 15일자 네이버 블로그에 남긴 글에서 시작됐다. 길 작가는 제16회 방송분 이후의 문제점을 언급한 글에서 "현종의 지방제도 정비도 나오는데, 드라마처럼 심한 갈등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라고 지적했다.

드라마 속 '대혼란', 실제로는 없었다
 
 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 KBS2
 
 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 KBS2
 
지난 주말 방영된 제17회 및 제18회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현종(김동준 분)이 전 공주절도사 김은부(조승연 분)의 건의에 따라 호족 견제정책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현종은 호족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들의 특권을 제약하고 지방관 증파를 추진하고자 한다. 이에 대신들은 불만을 품거나 반발한다. 하위직 신하들까지도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해 조정을 '셧다운'시킨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강감찬(최수종 분)의 반응이다. 그동안 현종에게 쓴소리 직언을 하면서도 큰줄기에서는 보조를 맞춰줬던 강감찬이 이 사안에서 만큼은 현종과 대립한다. 강감찬은 호족 개혁이라는 대의에는 찬동하면서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반대한다. 어전회의 상황을 보여주는 제18회 첫 장면은 분노한 현종이 강감찬에게 "한림학사 승지, 경을 파직하오"라고 선언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갈등은 강감찬이 김은부의 비행을 폭로하고 이에 격분한 현종이 강감찬을 찾아가 멱살을 쥐려다가 손을 내려놓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현종은 당장 개경을 떠나라며 절교를 선언한다. 그런 뒤 분노한 상태로 말에 올라 개경 시내를 마구 질주한다. 놀라 피하는 백성들 사이를 달리던 그는 교차로에서 짐수레와 충돌해 낙마한다. 이것이 제18회 끝장면이다.

지방제도 개편을 놓고 벌어진 이 정도 수준의 갈등이 자신의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원작자의 입장이다. 원작자는 제18회 끝장면이 현종을 암군이나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는 시청자 댓글에 "한국 역사상 가장 명군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라고 개탄했다. 이 같은 원작자의 반응이 이번 논란의 출발점이 됐다.

이 드라마 속의 지방제도 개편이 시행된 때는 음력으로 현종 3년 1월이다. 양력 1012년 1월 26일에서 2월 24일 사이의 일이다. <고려사절요>는 이때 "12주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와 75도 안무사를 설치했다"고 알려준다. 제2차 고려거란전쟁 직후에 이런 방식의 지방제도 개편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개편으로 국가적 분열이 일어났고 평정심을 상실한 현종이 낙마하는 정도의 상황까지 조성됐다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짤막하게라도 그것이 언급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반발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기록만 놓고 본다면 드라마에서 묘사된 대혼란은 실제로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호족 가문 출신인 강감찬이 현종과 극단적 갈등을 빚었다면, 이런 사실이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언급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강감찬열전에 나타나는 것은 제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로 강감찬의 조정 내 입지가 꾸준히 좋아졌다는 내용뿐이다. 드라마 장면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사실이다.

'고려거란전쟁' 속 또 다른 문제
 
 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 KBS2
 
그런데 <고려거란전쟁> 제17회와 제18회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원작자 블로그나 언론 보도에서 거론된 것 이상이다.

고려 전기에 중앙 군주와 지방 호족 간의 대립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에는 '군주 대 호족'이라는 쟁점도 당연히 담겨 있다. 종전보다 훨씬 많은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중앙 왕권이 호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장됐음을 의미한다.

현종 3년의 개편에는 그런 쟁점과 더불어 '군주 대 지방관'이라는 또 다른 구도도 담겨 있다. 군정장관의 성격이 농후한 절도사를 폐지하고 민정장관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한 안무사를 대거 파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 과정에서 권력이 비대해지기 쉬웠던 지방 군정장관 직을 없애는 작업이 전쟁 직후에 전개됐음을 의미한다.

호족들이 볼 때는, 강력한 절도사가 사라지고 온건한 안무사가 찾아오니 이는 그들에게 유리한 조치였다. 현종이 볼 때는, 이전보다 강하지는 못해도 훨씬 많은 수의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니 호족들을 더 촘촘히 견제할 수 있었다. 호족들의 시선을 '절도사 폐지'로 돌리면서 왕권을 확대시키는 절묘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반발이 최소화돼 <고려사절요>에 별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전쟁 중에도 현종과 호족의 갈등이 심했다는 점만 강조됐다. 이 구도에만 치중하다 보니, 현종과 절도사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점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고려사> 지채문열전에 따르면, 제2차 전쟁 중에 현종이 지금의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삼례역에 당도했을 때에 전주절도사 조용겸은 꽤 '캐주얼'하게 현종을 영접했다. 지채문열전은 그가 "야복(野服)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평복 차림으로 임금 앞에 나섰던 것이다.

만약 그런 차림이 전쟁 중이라 부득이했다면, 복장 문제가 역사서에까지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례하거나 고의적이라는 인상을 줬기에 기록됐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현종이 삼례역에 들어가지 않고 장곡역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전주는 후백제 도읍이라 태조께서도 싫어하신 곳'이라는 신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도사 조용겸의 태도에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조용겸이 임금을 자극할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후속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장곡역에 머무는 현종을 위협하는 무력 시위까지 연출했다. 왕족을 보좌하는 전중소감 유승건 등을 대동하고 북을 치며 장곡역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현종을 호위하는 지채문이 역문을 급히 잠궈야 했을 정도다.

지채문이 지붕에 올라가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너희는 누구냐?"라고 호통치자, 조용겸 무리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라며 조롱을 던졌다. 임금이 있는 데서 그랬으니, 사실상 임금을 조롱한 셈이다.

지채문이 유승건에게 '왕명이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유승건은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실상은 현종을 겨냥한 하극상 발언이었던 셈이다. 전쟁 중에 고려 황제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건 당시에는 힘이 없어 그냥 덮어둔 현종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철수(1011.3.6)한 지 6개월 뒤인 음력으로 현종 2년 8월 2일(양력 1011년 9월 2일) 조용겸과 유승건 등의 관직 자격을 박탈하고 유배형을 선고했다. 삭탈관직까지 시켰으니, 그때까지 얼마나 꾹꾹 참고 있었겠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4, 5개월 뒤인 1012년 1월 하순에서 2월 하순 사이에 현종은 절도사 제도를 폐지했다. 조용겸의 도발이 절도사 폐지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도발이 절도사에 대한 현종의 경계심에 영향을 줬을 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3년의 지방제도 개편을 건의한 이들은 최사위·장연우·황보유의 등이다. 이 중에서 최사위와 장연우는 직접 참전한 중앙관이자 문신들이다. 지방 절도사에게 권한이 집중하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조용경 사례와 이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전쟁 중에 강력해진 절도사들에 대한 중앙 문신들의 견제가 제도 개편을 추진한 원동력 중 하나였으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중앙 문신들의 이해관계와 관련해 1995년에 <한국학보> 제80집에 실린 김갑동 원광대 교수의 논문 '고려 현종대의 지방제도 개혁'은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의 절도사들에게 군사력이 집중되면 자신들의 지위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현종의 지방제도 개편이 큰 불상사를 초래하지 않으로 보이는 것은 중앙 문신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거란전쟁>에 묘사된 현종의 지방관 파견 시도는 호족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지만, 강력한 지방 군정장관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이 드라마가 현종의 제도 개편을 중앙군주 대 호족의 대결 구도로만 보여주고 이 개편이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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