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인배 작가 5주기... 사천 청널공원서 추모행사
[윤성효 기자]
▲ 19일 오후 사천 청널공원에 세워져 있는 ‘범보 김인배 작가 문학동판’ 앞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
ⓒ 윤성효 |
"그림도 잘 그리셨다. 국어 시간에 문학작품을 설명하면서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칠판에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도 했다.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알퐁스 도테의 <별> 작품을 설명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언덕에 앉아 별을 바라보는 소년소녀의 모습을 칠판 전체에 그림으로 그려 놓으셨다.
그때 <별> 작품이 너무 좋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머리카락이 희끗한 지금도 그때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도 딱딱할 수 있는 문학 작품에 대해 그림을 그려서 표현해 주어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19일 오후 경남 사천 청널공원에 세워져 있는 '범보 김인배 작가 문학동판'을 찾은 고인의 제자 여명순씨가 한 말이다. 여씨는 "고등학교 때 학생들에게 문학적 영향을 많이 주셨고, 문학을 재미나게 이야기 해주셨으며, 특히 일본과 관련한 역사 이야기를 잘 들려 주어 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해주셨다"라고 말했다.
이날 김인배(1948~2019) 작가 5주기를 맞아 유족과 제자, 후배, 문인들이 모여 조촐한 추모행사를 연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박정기 노거수를찾는사람들 대표활동가는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기고, 그림도 잘 그렸던 고인을 요즘 말로 하면 '융복합 인재'였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고인의 동생인 김도숙 수필가는 "오빠들이 네 형제였는데 젊어서는 밤 늦도록 문학과 철학을 두고 토론을 많이 하더라. 문학 전집이나 화보도 많았다. 알게 모르게 그런 걸 보고 자라면서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 고 김인배 작가. |
ⓒ 김도숙 |
고인은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중편 '방울뱀'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소설집 <문신>, <하늘궁전>, <후박나무 밑의 사랑>, <비형량의 낮과 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 <오동나무 꽃 진 자리>, <열린 문 닫힌 문>을 펴냈다.
또 역사·언어학 관련해 그는 <고대로 흐르는 물길>, <전혀 다른 향가와 만엽가>, <일본 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역설의 한일고대사>, <일본천황가의 한국식 이름연구 신(神)들의 이름>을 발간했다.
고인은 소설 <환상의 배>에서 고향인 '삼천포 각산개 앞바다'를 "'이제 눈을 감고 무어든지 꿈을 꿔보아라. 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몸속에서 들릴 때까지, 저 늑도 근처의 물밑에서 고둥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거라'하고 그는 누운 채 내게 꿈꾸는 법을 일러주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인배 작가는 <월간문학>(2017년 2월호)에 쓴 '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라는 글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걸작 한 편 남기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지식인의 자의식을 그린 고만고만한 소설들에 스스로 식상하여 1998년 이후부터는 아예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 대신 전부터 몰두해 오던 역사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그 방면의 논문들과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이어 "지나간 것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겨나게 하는 동인(動因)이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다. 사라짐이 없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역사 공부를 통해 얻은 교훈과 대상의 이면에 감춰진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나 스스로를 깨우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존재 증명 같은 것이다. 나에게 저술 활동의 의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 획득을 통해 가장 우리말다운 표현을 실현해 낸 작가로 평가 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라고 했다.
이처럼 '화가'라고 할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던 고인은 소설창작에 매진하다 우리나라 고대와 한-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당시 여러 언론에서 조명을 받았던 책을 펴내기도 하면서, 계속 '새로운 발견'에 나섰다.
그는 문단 데뷔작인 중편 <방울뱀>에서부터 시작해 잇달아 발표한 작품들이 한국대표소설집의 곳곳에 수록됐다. 그의 작품은 <한국단편문학전집>(금성출판사, 1987), <우리 시대의 소설>(정음사, 1988), <정통 한국문학대계>(어문각, 1989),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계몽사, 1991), <한국해양문학선집>(한국경제신문사, 1995) 등에 등재돼 있다.
소설 이외에 역사학, 특히 한일 고대사 문제와 향가 연구에 깊이 천착했던 그는 역사논문 "해류를 통해 본 한국 고대 민족의 이동"을 역사 종합 계간지 <역사비평>(1989, 가을호)에 발표해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펴낸 연구서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1991년),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1993년)가 나올 때마다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일본의 고대시가(詩歌)를 우리 고대어로 풀이한 <만엽가의 수수께끼>가 일본어로 번역돼 종합 월간지 <호-세키(寶石)>(1993. 11월호)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
▲ 고 김인배 작가가 펴낸 책들. |
ⓒ 김도숙 |
김인배 작가는 경남문인협회 초대 부회장, 국제펜클럽 회원, 동아시아 고대학회 회원, <작가> 동인으로 활동했고, 창신대 문예창작과와 진주교대 학부·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국어교육)는 고인이 별세했을 당시 <오마이뉴스>에 실린 '추모글'을 통해 "2018년에 간행한 <열린 문, 닫힌 문>은 포스트모던 양식의 역사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대작주의를 지향한 소설입니다. 양적인 측면에선 대하소설의 원고 량에 미치지 못합니다만 질적인 혁신의 측면에서 볼 때 방대한 언어의 그물망을 펼쳐놓은 지적인 총체소설이란 관점에서 기존의 대하 역사소설의 문법을 능가하는 경이로운 작품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송 교수는 "아쉽게도, 형님은 살아생전에 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비평적 가치평가가 내려지기 이전에 서둘러 떠나는군요. 더 아쉬운 사실은 형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신 마지막 창작집의 원고를 완성하고도 출판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점입니다"라고 했다.
정삼조 시인은 한 추모글에서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삼천포 지역의 대표 문인을 꼽는다면, 시로는 박재삼 시인이고 소설로는 김인배 작가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고인이 남긴 유고작 '이상하고도 야릇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출판을 못하고 있다.
▲ 사천 청널공원에 세워져 있는 ‘범보 김인배 작가 문학동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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