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애호가라면, 파스퇴르에게 한 번쯤은 감사 인사를! [윤한샘의 맥주실록]
맥주는 다양한 재료들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술입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문화를 타고 이어오고 있습니다. 수천 가지 맥주도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맥주 재료가 양조사를 만나 맥주로 바뀌는 과정을 풀어보겠습니다. <기자말>
[윤한샘 기자]
▲ 안톤 판 레이후크의 초상 |
ⓒ 위키미디어 공용 |
그는 더 작은 세계의 심연을 보고 싶었다. 연못 물, 식초, 술을 비롯해 자신의 머리카락, 피 심지어 정자까지 닥치는 대로 관찰했고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살아있는, 아주 작은 무엇인가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던 것이다. 남자는 이 놀라운 발견을 기록했고 주위의 도움으로 런던 왕립 학회에 결과를 보냈다. 1680년 학회는 이 놀라운 발견을 한 그를 정식 회원으로 선출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있다
17세기 렌즈 속 미생물로 유럽을 놀라게 한 남자는 안톤 판 레이후크였다. 현미경의 발명가이자 최초의 미생물학자로 기록된 그는 사실 과학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업가였다. 미시 세계 발견은 순전히 우연과 호기심의 발로였다.
▲ 안톤 판 레이후크의 기록들 (1682) |
ⓒ 위키미디어 공용 |
동시대 학계 기득권을 잡고 있던 화학자들은 미생물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부패와 발효는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을 옹호했다. 20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이 학설을 부정할 수 있는 간 큰 과학자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발생설에 대한 반증은 그로부터 200년 후에 나왔다. 발효와 부패의 주인공이 미생물이라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바로 루이 파스퇴르다. 1856년 파스퇴르는 와인 부패 현상을 연구한 끝에 젖산 발효의 원리를 밝혀냈다.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에서 젖산균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1858년에는 효모가 당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변환시킨다는 알코올 발효에 대한 완전한 논문도 게재했다.
그가 고안한 저온 살균법은 맥주, 와인, 우유가 공기 중 미생물과 접촉해 발생하는 신맛과 이취를 막기 위한 해결책이었다. 이런 파스퇴르의 연구는 자연발생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기득권 과학자들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이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실험에 대한 대가로 2500프랑을 내걸었다. 1803년에 이미 발효의 실체를 밝히는 자에게 순금 1kg을 수여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으나 그동안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1863년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반박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한다. 이때 사용한 도구가 백조목 플라스크다. 그는 세 개의 플라스크 안에 팔팔 끓인 육수를 넣은 후, 하나는 입구를 잘라 구멍을 만들고 다른 한 개는 플라스크 관 끝으로 보내 공기를 접촉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플라스크는 공기와 접촉을 차단했다.
그 결과, 공기를 접촉시킨 두 플라스크 속 육수는 상했지만 그렇지 않은 육수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파스퇴르는 공기 중 미생물이 부패와 발효의 원인임을 밝혀내며 2000년간 유지되던 자연발생설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당연히 2500파운드의 상금도 그의 몫이었다.
"자연발생설은 이 간단한 실험에서 영생의 삶을 잃었습니다. 미생물 없이, 부모 없이 이 세상에 온 생물은 없습니다." <파스퇴르>
파스퇴르 이후 생물학과 세균학은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식품 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온 살균은 맥주와 우유의 유통기한을 늘렸고 품질을 개선했다. 알코올 발효를 담당하는 효모는 파스퇴르 연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파스퇴르가 1876년 발간한 <맥주에 관한 연구>에서 효모는 슈퍼스타였다.
▲ 실험 중인 파스퇴르 |
ⓒ 위키미디어 공용 |
효모는 세균과 다르다. 박테리아로 불리는 세균은 원핵생물이다. 원핵생물은 세포막이 없다. 따라서 핵이 없고 1개의 DNA를 가진 염색체가 세포질 내에 존재한다. 무성 생식을 하며 단순 분열로 번식한다. 환경과 조건이 맞으면 30분 내에 전 지구를 덮을 수도 있다.
효모는 우리와 같은 진핵생물이다. 유전정보를 보유한 핵과 세포소기관들이 세포막 안에 존재하며 호흡을 담당하는 미토콘드리아를 갖고 있다. 진핵생물 중 진균류에 속하지만 곰팡이와 또 달라 핵과 소기관을 그대로 복제하는 체세포 분열을 통해 번식한다. 그 모양이 싹이 트는 듯하여 출아(出芽) 또는 버딩(budding)으로 부른다. 난형 또는 구형이며 세균보다 커서 고배율의 현미경이 없어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효모는 세균보다 훨씬 고등생물이다. 세균으로 착각하면 효모가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효모든 세균이든 생존과 번식을 한다. 먹이 활동과 생존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물에 인간은 발효와 부패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발효, 불리하면 부패,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이었다.
김치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조상은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고 항아리에 담은 후 땅속에 묻었다. 산소가 차단된 항아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녀석은 젖산균이었다. 젖산균은 산소가 없는 혐기적 환경에서 배추를 먹고 젖산과 이산화탄소를 내뱉었다.
젖산은 다른 유해균의 접근을 막고 적절한 산미를 부여했다. 게다가 배추 켜켜이 쌓인 탄산은 김치에 아삭함을 선사했다. 젖산균이 행한 이 모든 과정을 젖산 발효라고 한다. 우리는 적당한 산미와 식감을 가진 김치를 익었다며 좋아하는 반면 시간이 지나 젖산 가득하고 탄산이 빠진 김치를 시었다고 평가한다.
맥주는 김치와 미생물, 과정, 결과 모두 다르지만 역시 발효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 발효의 주인공은 균이 아니라 효모다. 효모는 독특하다. 산소가 있는 곳에서는 당을 먹고 인간처럼 이산화탄소와 물을 뱉으며 번식하지만 산소가 사라지면 곧바로 생존 모드에 돌입한다. 당을 먹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알코올이다.
이렇게 혐기적 환경에서 효모가 당을 먹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드는 것을 알코올 발효라고 한다. 기특한 건, 알코올 중에서도 메탄올이 아닌 에탄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탄소(C)가 하나만 덜 붙었어도 술이란 단어는 인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이전 맥주는 물보다 안전했다. 칼로리가 되어 힘도 솟게 했다. 180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서는 아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맥주로 하루를 시작했다. 물론 알코올과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해 무지했을 때 이야기다. 그나마 맥주는 과일발효주나 증류주에 비해 낮은 알코올을 품고 있어 큰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드물었다.
▲ 칼스버그 연구소장을 맡았던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 |
ⓒ carlsberg group |
효모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모든 곳에 존재한다. 이 글을 보고 있는 핸드폰이나 PC, 책상, 벽, 심지어 당신의 손과 얼굴에도 붙어 있다. 이런 효모를 야생 효모라고 한다. 8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첫 맥주를 선물했던 효모다. 하지만 인간은 점점 자신의 취향에 맞게 효모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마치 늑대가 개로 바뀐 것처럼 인간이 원하는 효모만 곁에 남았다. 이렇게 인간이 길들인 효모를 배양 효모라고 한다.
19세기 이후 인간은 이 효모에게 사카로마이세스 세레비시에(Sacharomyces cerevisiae)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사카로는 당, 마이스는 균을, 그리고 세레비시에는 라틴어로 곡물을 뜻한다. 이런 학명이 붙은 이유는 빵과 맥주 발효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효모이기 때문이다.
이 효모는 인간이 활동하는 섭씨 20~30도의 상온에서 짧은 시간 활발하게 발효한다. 이때 발생하는 탄산이 효모를 위로 떠오르게 해 '상면발효효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면발효효모는 발효 부산물로 뚜렷한 에스터 향을 남겼다. 이 효모 향이 상면발효맥주(top-fermenting beer)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배, 사과 같은 과일 향부터 정향, 후추에 이르는 향신료 향까지 효모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상면발효맥주는 자취를 감췄다. 뉴 페이스가 나타나자 인류는 효모 향이 묻어있는 오랜 친구에 등을 돌렸다. 라거로 명명된 이 맥주는 효모가 만들어내는 향이 없었다. 대신 깔끔한 청량함으로 갈증 해소에 탁월했다.
라거는 '저장하다'라는 독일어에서 유래됐다. 15세기경 인간은 알프스산맥이 맞닿아 있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에서 섭씨 10도의 낮은 온도에서 발효된 액체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효모는 상면발효효모와 달리 오랫동안 천천히 당물을 즐겼다. 더 많은 당을 먹어 치워 단맛은 덜했지만 청량했고 향을 만들지 않아 깔끔했다.
▲ 전용잔에 담긴 칼스버그 |
ⓒ 윤한샘 |
파스퇴르와 동시대 가장 위대한 미생물학자였던 코흐는 세균학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공로로 1905년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미생물학에 끼친 영향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한천을 사용해 미생물을 배양한 '한천 배지법'이 라거 맥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한천 배지법은 순수한 라거 효모를 분리하기 위해 고심 중이던 칼스버그 연구소장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에게 해답을 제공했다. 그는 여러 효모 균체 중 순수한 라거 효모를 분리하면 칼스버그 맥주의 품질과 일관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83년 마침내 한센은 코흐 배지법을 이용해 라거 효모의 순수 분리 및 배양에 성공했고 이는 라거 맥주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 라거 효모의 학명이 사카로마이세스 파스토리아누스(Saccharomyces pastorianus) 또는 사카로마이세스 칼스버겐시스(Saccharomyces carlsbergensis)인 것은 위대한 미생물학자들에 대한 존경과 헌사다.
21세기 크래프트 맥주 양조사들은 라거로 단순해진 시장에 다채로운 맥주들을 선보이며 다양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사라졌던 상면발효맥주를 적극적으로 양조하며 에일이라고 불렀고 이런 영향으로 현재 상면발효효모는 에일 효모, 상면발효맥주는 에일로 통용되고 있다.
▲ 사카로마이세스 세레비시에 |
ⓒ 위키피디아 |
2011년 미국립과학원회보는 라거 효모가 남미 파타고니아에서 채집된 야생효모 게놈과 99% 일치한다는 논문을 게재하며 눈길을 끌었다. 추운 지역에서 발효하는 능력을 가진 효모가 유럽으로 건너와 에일 효모와 만나 지금의 라거 효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4년 중국에서는 티베트에서 라거 효모 유전자를 가진 야생 효모를 발견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인간과 함께 실크로드로 들어온 후, 에일 효모와 접촉해 강한 발효력을 가진 라거 효모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진짜인지 여전히 논란은 진행 중이다. 허나, 효모 출생의 비밀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더 중요한 건 효모가 인류의 멋진 동반자라는 사실 아닐까. 당연히 효모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녀석들의 마법으로 환생한 맥주가 우리와 영원하길 바라며,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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