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지의 제 2막
Q : 지난 2022년 촬영한 넷플릭스 영화 〈리프트: 비행기를 털어라〉(이하 〈리프트〉)가 1월 공개를 앞두고 있죠. 역할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요. 예고편으로 유추해 보면 기계를 다루는 것 같아요
A : 맞아요. 이름은 ‘미선’이고, 해커예요. 저마다 다른 기술을 갖춘 도둑이 모인 조직에서 도둑질에 필요한 데이터 시스템과 기계를 만드는 인물이죠. 정확히 말하면 팀 내 브레인이에요. 똑똑하죠. 처음 미선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감독님께 고모의 친구 이름 같다고 했더니 웃으시더라고요. 미선은 제 평상시 모습과 정반대의 면모를 가졌어요.
Q : 어떤 면에서 정반대인가요
A : 일상에서 저는 기계치거든요(웃음). 기계를 잘 다뤄야 하는 역할이라 촬영이 없을 때도 촬영 소품으로 많이 연습했어요. 소품을 개발한 미술감독의 도움도 얻어가며 나름 노력도 많이 했죠.
Q : 2021년 〈마인〉 이후 〈리프트〉를 준비하기까지 2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A : 가장 큰 사건은 결혼이죠. 결혼하고 〈동상이몽 2-너는 내 운명〉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가족도 많은 사랑을 받는 감사한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리프트: 비행기를 털어라〉 오디션 공고를 보고 오디션 영상을 찍어 보냈어요. 그게 2022년 초반이었네요. 오디션 보고 한 달 뒤에 합격 통지를 받아 3월부터 4개월간 이탈리아와 영국, 아일랜드에 머물며 촬영했어요.
Q : 오디션 각본을 3일 동안 외워서 8시간 동안 연기 영상을 촬영했다고 들었습니다. 지원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A : 〈오션스8〉(2018)이나 〈이탈리안 잡〉(2003)처럼 항상 도둑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도둑들이 나오는 영화에서 연기하기를 갈망했거든요. 재미있잖아요(웃음). 메인 배우 케빈 하트의 영향도 컸어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업사이드〉(2019), 〈쥬만지: 넥스트 레벨〉(2019) 등에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을 잘하고 있는 배우예요. 연출가이기도 해서 이번 작품에서도 연출을 맡았어요. 오디션 공고에 적힌 그의 이름만 보고 너무 흥미진진한 영화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Q : 20대 때부터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으로만 봤던 그와 촬영하니 어땠나요
A : 촬영을 막 시작할 즈음 케빈 하트가 아일랜드의 작은 코미디 클럽에 배우들을 모두 초대해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즉흥으로 선보였어요. 영상으로 봤던 그의 무대를 직접 보고, 매일 촬영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동료 배우라고 생각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어요(웃음). 코미디언과 프로듀서, 배우. 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그를 가까이서 보니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죠. 좋은 자극이었어요.
Q : 합격 후 시놉시스를 처음 봤을 때 어느 때보다 설렐 것 같아요
A : 그렇죠.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설렌 순간이죠.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의 도둑이 뭉쳐 항공기 공중 납치에 도전하는 내용에 마음이 갔어요. 무엇보다 도둑들의 뚜렷한 개성이 흥미로웠고, 이들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이는 영화예요. 누구 하나의 색깔도 죽지 않고 살아 있어요.
Q : 기술직 해커 미선 역을 분석하며 참고했던 작품이 있다면
A : 영화감독이 〈이탈리안 잡〉을 연출한 F. 게리 그레이예요. 〈이탈리안 잡〉에서 해커 라일을 연기한 세스 그린을 많이 참고했어요.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잘 구축했다고 생각해요. 컴퓨터 스크린 같은 기계를 다루는 장면은 대부분 CG라 혼자 상상하며 촬영해야 했죠.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참고했어요. 예고편에서 제가 선글라스를 탁 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선글라스가 모든 걸 제어하고 작동할 수 있는 컴퓨터 스크린입니다. 처음에는 없는 걸 있는 척하는 게 꽤 힘들었어요(웃음).
Q : 미선과 윤지의 싱크로율은
A : 기계를 잘 다루는 능력만 빼면 거의 비슷합니다. 각본에 미선은 시니컬한 캐릭터라고 쓰여 있어요. ‘시니컬하다’는 게 딱딱하다는 의미보다 아주 심각한 상황인데 혼자 웃는, 꽤 유머러스하다는 걸 의미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잘 못 버텨요. 심각한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농담을 툭 던지는 타입이거든요. 미선의 이런 성향에 주목해서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Q : 극중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겪은 흥미롭거나 독특한 일화가 있다면
A :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문화 차이나 언어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한국인으로서 촬영하며 느낀 감정은 자랑스러움이죠. 어릴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요.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거나, 북한인지 남한인지부터 먼저 물어봤죠. 요즘은 확실히 달라요. 한국 출신임을 밝히면 ‘그 아이돌 그룹 좋아한다’ ‘한국의 그곳, 그 음식 좋아한다’ 등등 한국의 좋아한다는 대답만 술술 나와요. 나를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울컥했어요. 한국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걸 실감했어요. 그 위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촬영해야겠다는 결심이 앞섰어요.
Q : 〈종이의 집〉 주인공 도쿄를 연기한 우슬라 코르베로와도 이번 작품을 촬영하며 친해졌다고요. 〈동상이몽 2-너는 내 운명〉에서도 언급한 적 있죠
A : 나이가 한 살 차이라 자주 대화했고,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됐어요. 우슬라는 스페인, 저는 한국에서 와서 연고지가 아닌 촬영지에서 석 달 동안 서로 많이 의지했어요. 고향이나 가족이 그립고 몸과 마음이 지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촬영하고 호텔 로비에서 둘이 와인 한잔하면서 가족이나 남자친구 이야기하는 게 많이 위로가 됐어요. 배우로서 저보다 경험이 많은 친구여서 연기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죠.
Q : 우슬라의 위로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A : 스스로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마다 우슬라에게 “나 괜찮게 하는 것 같아?” 물으면 정말 별말 없이 ‘너 잘하고 있어’라는 제스처 하나로 마음 놓게 해줬어요.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과 정서적으로 잘 맞다잖아요. ‘정(精)’이 형성되는 국가가 흔치 않은데, 스페인은 정을 주고받는 문화가 존재한대요.
Q : 〈리프트〉 촬영을 마친 후 남은 것은
A : 결혼하고 3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직업적으로 고민이 깊었어요. 그러다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처럼 좋은 작품을 만나 더 넓은 곳에서 값진 경험을 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이 배웠어요. 그 과정에서 남은 건 나이나 인생의 특정 시점과 상관없이 어느 때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나이 때문에, 시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는 말은 나를 갇힌 사람으로 만들더라고요.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언제든 시작일 수도, 끝일 수도 있어요. 저에겐 지금이 시작이에요.
Q : 앞으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폭이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나요
A : 연기적인 경험은 제한 없이 다 도전해 보고 싶고, 그게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쉴 때는 다양한 작품을 찾아보고 꾸준히 공부하고 있어요. 나중에는 직접 연출까지 해보고 싶거든요. 향후 10~20년의 목표입니다.
Q : 미선 역할이 연기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자극이 됐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며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A : 그렇죠. 미선을 준비할 때는 모든 게 새로웠고 기대감이 컸죠. 지금까지 해온 역할과는 아주 상반돼서 연기적으로도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큰일을 앞두면 지레 겁먹고 걱정만 했어요. 한 가지 일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걱정하고, 대비하고, 준비하는 성격이었죠. 이번에 장기간 해외 촬영을 하며 모든 걸 다 대비하고 준비할 수 없다는 걸 느꼈어요. 오히려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믿어보려고요. 걱정을 좀 덜고 부딪혀보자는 마인드로 바뀌었어요. 예전 같으면 오늘 촬영장에 보부상처럼 바리바리 챙겨 왔을 거예요. 근데 텀블러 하나만 가져왔어요.
Q : 〈말하는대로〉에서 미래가 막막할 때 ‘좋아하는 걸 하라’는 어머니의 말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나만의 법칙은
A :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도 어떻게 늘 좋은 일만 있겠어요? 저는 안 좋은 감정을 오래 안고 가지 않아요. 딱 하루만 깊게 힘들어하고 다음 날 아침부터 루틴대로 일어나서 명상하고 하루를 시작하죠.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번 무너지면 회복이 더디거든요. 이젠 혼자가 아닌 동반자와 함께 붙어 있죠.
Q : 집에서 김윤지는 어떤 사람인가요
A : 이건 남편한테 물어봐야 하는데(웃음). 20대 때는 신나게 돌아다니는 게 재충전하는 방법이었어요. 근데 30대가 되니까 혼자 맛있는 걸 먹고 운동하고 지내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나를 재충전하는 방식이 확 바뀌었죠. 최근 아파트 경비원분이 저보고 해외 나가 있었던 거 아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더니.
Q : 2024년은 어떤 해가 될까요
A : 할리우드영화를 찍었고, 성공리에 개봉을 앞두고 있죠. 시사회와 홍보 투어 참석이 제겐 꿈 같은 일이거든요. 좋은 기운으로 시작하는 만큼 2024년은 굴곡 없이 중간 어딘가에 머물며 평탄하게 오래가고 싶어요. 그게 제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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