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렬한 '빤스고개', 그 이름을 둘러싼 소문들

완도신문 유영인 2024. 1. 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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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 제주를 잇는 곳, 전남 완도 맹선마을 포구와 상록수림

[완도신문 유영인]

ⓒ 완도신문
전남 완도 소안도의 진산인 가학산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있다. 맹선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청룡백호산(靑龍白虎山)이다. 그 청룡백호산의 아늑한 품에 안긴 마을이 대선(大仙)과 소선(小仙)마을인데 둘이 합쳐져 만들어진 마을이 맹선(孟仙)마을이다.

맹선마을은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중간 기착지로 이름을 알렸을 뿐 아니라 인근을 항해하는 배들이 갑작스런 일기변화로 어려움을 겪으면 피항하는 피항지로서도 역할을 다해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맹선마을 바다 건너에는 당사도(唐寺島)라는 섬이 있다. 당사도는 조선시대 제주 화북진(禾北鎭) 이나 조천진(朝天鎭)에서 관두포(해남군 화산면)나 이진진(梨津鎭 해남 북평면)으로 항해를 할 경우 제주 해협을 막 건너면 만나게 되는 섬이다. 과거에는 항으로 들어오는 곳이라 하여 항문도(港門島) 또는 자지도(者枝島)라 했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지금은 당사도로 불리고 있다. 당사도는 지정학적으로 제주에서 육지로 건너오는 배들의 등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섬이었다.

맹선마을의 포구와 수백년 된 상록수림은 거친 제주바다를 건너온 배와 선원들의 휴식처 역할을 했다. 또한 조선후기까지도 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배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候風處) 역할을 했던 중요한 항구였다. 
   
그래서 소안도에는 영세불망비 비석 두 기가 세워져 있는데 모두 제주목사를 지냈던 인물들이다. 하나는 백락연영세불망비(濟州牧使白公樂淵永世不忘碑)이고 하나는 심현택영세불망비(濟州牧使沈公賢澤永世不忘碑)'이다. 두 기 다 소안도를 제주도로 가는 배들의 기항지로 만들고 낙후된 섬의 문화융성과 개발에 크게 기여한 은공을 감사히 여겨 소안도 주민들이 건립한 것이다. 

육지와 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이자 포구인 맹선마을에는 미라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과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마을 숲이 있다. 

수백년된 상록활엽수림으로 지난 1983년 천연기념물(제430호)로 지정된 맹선리상록수림(孟仙里常綠樹林)이다. 바다와 맞닿은 이 수림은 수백년 된 후박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생달, 메밀잣밤, 구실잣밤, 감탕나무 등 21종 250여 그루의 아름드리 상록수림이 분포돼 있다.

특히 마을의 중심에 있는 큰샘 주변의 후박나무는 수령이 1000년을 넘었다고 하나 이는 다소 과장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후박나무는 한 밑둥에서 다섯가지가 나왔는데 수고는 15m, 가지 하나하나의 흉고둘레는 각각 150~180cm다. 

마을 앞 바닷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이 숲은 맹선마을의 당숲이기도 했지만 방풍림이기도 했고, 어부림으로, 또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풍치림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 숲에 대해 굳이 사족을 붙인다면 첫째, 소안도의 서부 사람들이 빤스고개를 넘고 나서 더위를 식히는 휴양림 역할을 크게 했다. 둘째, 숲의 중앙에 있는 수령 1000년이 넘었다는 후박나무 밑 큰 샘은 영천(靈泉)으로 맹선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군함과 어선들의 식수 공급원으로 역할을 했다. 셋째, 많은 배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일본인들이 숲 밑에서 생필품 장사를 하였고 엄청난 폭리를 취해서 저항운동이 심했다고 한다. 또 나무그늘 아래서 장이 섰다고 하나 기록은 없고 '장뜰'이라는 지명이 구전돼 오고 있다.

맹선마을은 매년 정초가 되면 이 숲에서 당제를 모셨는데 주민들은 이 숲에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주민들이 해상에서의 무사고와 안녕을 비는 당제를 성대하게 치렀으나 코로나19 이후로 당제를 모시지 않고 있다.

빤스고개를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
 
ⓒ 완도신문
 
맹선리상록수림은 자연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으로도 지역문화에 대한 매우 중요한 환경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항일독립운동과 빤스고개 이야기다.

맹선마을은 김남두(金南斗 건국훈장 애족장), 이갑준(李甲準 대통령표창), 최형천(崔亨天 건국훈장애족장)선생 등 세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마을의 큰 샘에서 일본군함이 식수를 싣고 가거나, 일본인들이 상록수림 주변에 통어어업(通漁漁業)전진기지를 설치하고 일본어민들이 계절어업으로 고기를 싹 쓸어가는 수탈을 보면서 저항의 정신을 길렀다고 한다.

빤스고개는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고개로 거리는 1.2km로 비교적 짧은 거리다. 

오늘 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1980년대 초까지 소안도의 남부(동진, 서중, 소진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면 소재지인 비자리로 일을 보러 오거나, 학생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벽에 밥을 먹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반드시 넘어야 하는 눈물과 회환과 추억의 고개였다.

이름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맹선리에 사는 사람들이 들이 넓은 진산리에 농토를 사 놓고 농사를 지으면서 지개를 지고 쟁기질을 가거나 수확물을 가져올 때 고개의 경사가 심해 땀을 뻘뻘 흘리자 팬티만 입고 고개를 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진산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고개를 넘으면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자 팬티만 입고 넘었다고 하는 설이다. 마지막은 앞에 가는 사람의 속옷이 보인다는 설로 경사도가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암튼 힘든 빤스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오면 상록수림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피로감을 없에 주었다고 한다. 

빤스고개 넘어 진산리에서 시집 온 박주자(84, 소안면 맹선리) 할머니를 마을 경로당에서 만났다.

"나는 22살에 재 넘어 진산리서 가마 타고 시집 와서 62년을 살었구만. 시집 올 때는 여그 숲이 엉성해도 고기를 불러들이는 숲이었어. 그때는 천연기념물이 아니고 그래서 바닷가 큰 나무 밑에 여러집이 집을 짓고 살었어. 우리가 살던 집은 일본사람들이 살었던 집터였는디 바람이 크게 불먼 우리집 마당까지 파도가 치는 거여. 그래서 태풍이 불먼 웃동네로 피신을 했제.

그때는 봄이 되먼 징어리(멸치의 방언으로 크기가 10cm내외의 멸치를 말한다)가 숲 밑으로 막 밀려와 그때는 숲 밑이 짝지였거든. 그라먼 우리는 옴박지하고 양철동우에다가 막 주서서 젓갈도 담고 또 묵은지하고 지져묵었는디 지금은 그 징어리가 으드로 가붓는가 한나도 없어.   

시집 올 때 쩌그 빤스고개를 넘어서 왔거든. 그때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는디 빤스고개를 넘을 때는 가마꾼들이 심든께 나도 가마에서 내러서 걸어서 왔어. 대선마을에 와서 다시 가마를 타고 시댁에 왔는디 진산리는 바다가 멀잔애. 그란디 여그는 바로 집앞이 바다여. 그때는 바닷물도 참말로 깨끗하니 훤히 딜다보여. 여름이먼 애기들은 짝지에서 목욕하고 어른들은 후박나무 아래서 쉬고 엇그저깨 같은디 세월이 참말로 빠름마.

날에는 후박나무껍질을 후박피(厚朴皮)라고 했어. 한약방에서 약으로 쓴다고 몰려서 폴고 그랬는디 우리마을 저 후박나무는 마을에서 껍질을 못 베끼게 해. 그랑께 나무가 저라고 좋아."
 
ⓒ 완도신문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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