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으면 시간 순삭, 거장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 [B메이저 - AZ 록 여행기]
[최우규 기자]
예전에 자주 가던 음반 가게가 있었다. 주인장은 1960, 70년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샘플러 CD를 만들어 단골에게 나눠줬다. 집에 와서 CD를 돌리다가 한 곡에 속된 말로 '꽂혔다'. 앉은 자리에서 세 번 연이어 들었다. 정말 좋았다.
영국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인 키스 크리스마스(Keith Christmas) 노래였다. 크리스마스는 1960년대 음악을 시작해 50년 넘게 음악을 하고 있다. 낡지도 닳지도 않는 창의력으로 무장한 사이키델릭 포크의 거두이다.
크리스마스는 1946년 영국 에식스 주의 위벤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형이 모아놓은 블루스 레코드를 들었다. 어머니는 버디 홀리(Buddy Holly) 팬이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포크에 몰렸고, 어쿠스틱 기타를 잡았다.
크리스마스는 영국 명문 바스(Bath) 대학 건축과에 들어갔다. 수업을 들으면서도 바스와 브리스톨 대학가 클럽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뛰어난 기타 연주력과 노래 솜씨는 금세 소문이 났다.
키스 크리스마스는 어쿠스틱 기타로 들려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를 들려준다. 때론 담백하게, 때로는 끈적하게 연주할 수 있다. 전자 증폭기 도움 없이도 음의 공간을 꽉 채운다. 줄을 뜯고 튕기고 문지르고, 기타 몸통을 두드려 연주한다.
▲ 키스 크리스마스의 <스티뮬러스> LP. |
ⓒ magic bux |
크리스마스는 스튜디오 녹음 경험이 없었다. 녹음을 위해 브리스톨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런던을 왕복했다. 당시 인기를 모으던 사이키델릭 록 밴드 마이티 베이비(Mighty Baby)가 반주를 맡았다.
앨범 첫 곡 '트래블링 다운(Travelling Down)'은 아련하고 정겨운 곡이다. 한번 들으면 귀에 쏙 들어오는 후크(hook, 반복돼 기억에 남는 부분)가 매력적이다. 두 번째 곡 '베드시트 투 스텝(Bedsit Two Step)'에서 보컬은 여린 듯 높고 섬세하다. 밴드 퀸(Queen)의 '레이징 온 어 선데이 애프터눈(Lazing on a Sunday Afternoon)'을 연상케 한다.
세 번째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은 연주곡이다. 자유자재로 어쿠스틱 기타 줄을 튕긴다. 그렇다고 알 디 메올라(Al Di Meola) 같이 빠르거나, 토미 엠마누엘(Tommy Emmanuel)처럼 화려한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잘 익은 과일주 같은 맛깔난 연주다. 네 번째 '아이스 맨(Ice Man)'은 곡 흐름이 팝의 일반적 진행과 다르다. 낯설지만 즐거운 사이키델릭과 포크의 중간 맛이다. 중반에 들어오는 일렉트릭 기타 솔로 때문에 소리의 단단함이 더해진다.
이 앨범에서도 내 취향은 B면으로 향한다. 첫 곡은 숨겨진 명곡 '아이 노우 유 캔트 루스(I Know You Can't Lose)'. 컨트리록 냄새를 풍긴다. 윌리 넬슨(Willie Nelson)이든, 이글스(Eagles)든,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든, 누구든 목소리를 얹으면 딱 좋을 것 같다.
▲ 키스 크리스마스 데뷔 앨범 스티뮬러스 뒷면 영국 사이키델릭 포크 거장 키스 크리스마스 데뷔 앨범 스티뮬러스 뒷면 |
ⓒ 최우규 |
크리스마스는 1970년 두 번째 앨범 <페이블 오브 더 윙스(Fable of the Wings)>를 냈고, 그해 처음 열린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섰다. 1971년에는 <키스 크리스마스(Keith Christmas)>와 <피그미(Pigmy)> 앨범을 발매했다. 1972년 잡지 사운즈(Sounds) 필진은 크리스마스를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6명의 기타리스트 중 한명으로 꼽았다. 크리스마스 장기는 어쿠스틱 기타이지만, 일렉트릭 기타 솜씨도 그에 못지 않았다.
아티스트들의 도움 요청이 빗발쳤다. 명단을 보면 가히 록 명예의 전당이다. 후(the Who),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아젠트(Argent), 프랭크 자파(Frank Zappa), 킹 크림슨(King Crimson), 킹크스(the Kinks),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 록시 뮤직(Roxy Music) 등.
크리스마스는 1968년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조우했다. 보위는 런던에서 대안적 문화 센터인 베커냄 아츠 랩(the Beckenham Arts Lab)을 운영 중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그곳에 초청돼 연주했는데, 보위가 반했다.
보위는 <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 앨범을 녹음 중이었다. 보위는 크리스마스를 스튜디오로 데려갔다. 리허설도 없었다. 그저 몇 곡을 들려줬다. 크리스마스는 거기에 맞춰서 기타 연주를 했다. 그렇게 해서 <스페이스 오디티> 앨범에서 '레터 투 허마이어니(Letter to Hermione), 갓 노우스 아임 굿(God Knows I'm Good), 오케이셔널 드림(Occasional Dream)' 등 세 곡에 크리스마스 연주가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는 킹 크림슨 베이시스트이자 보컬인 보즈 버렐(Boz Burrell)과 친해졌다. 킹 크림슨이 1971년 <아일랜즈(Islands)>를 내고 공연을 할 때 크리스마스는 객원 연주자였다. 버렐은 킹 크림슨 리더 로버트 프립(Robert Fripp)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버렐은 프립과 떨어져 있기 위해 크리스마스 차를 얻어 탔다. 그러면서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당시 크리스마스는 세 개의 삶을 살았다. 큰 공연장에 서는 대형 밴드 일원, 브리스톨 대학가를 휩쓰는 포크 가수, 그리고 건축가. 1980년대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건축 관련 사업을 지속했지만, 음악을 잊지 않고 1990년대 복귀했다.
나이가 들어 약간 쉰 소리를 내지만, 피치는 바뀌지 않았다. 기타 연주는 원숙함을 더했다. 그는 노래로 부조리와 터무니없는 정치를 비판하면서 삶을 관조한다. 포크부터 블루스, 사이키델릭까지 이 노장은 변함없이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와 연주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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